구속연장 여부를 앞두고 서울구치소에서 변호인단을 만난 박근혜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은 변호인단이 고심 끝에 만들어 온 여러 재판 대응 방안 중 변호인단 8명 전원 사임을 결정했다. 결정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듣고, 고민 끝에 재판 거부 전략을 선택한 것. 다음날이자 구속 연장 결정 후 열린 첫 재판에서, 박 전 대통령은 처음으로 손을 들고 재판부에게 발언권을 희망했다. 그리고 준비해 온 원고를 담담히 읽어 내려갔다.
“검찰이 6개월 동안 수사하고 법원은 다시 6개월 동안 재판했는데 다시 구속이 필요하다고 하는 건 저로선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 이상 재판부를 믿을 수 없다”고 읊었다. 그러면서 변호인단도 기다렸다는 듯이 사임의사를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 재판부는 “재판 진행이 쉽지 않아진다, 구속 기간이 더 길어질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소용없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마친 뒤 유영하 변호사와 함께 나서고 있다.
언뜻 봐서는 박 전 대통령 스스로 불리한 선택을 한 게 맞다. 10만 권에 달하는 방대한 수사 자료와 80회에 달하는 재판기록을 감안할 때 제대로 된 변호를 받기 힘들어지는 점은 자명하다. 재판부는 기존 변호인단을 대신할 국선 변호인단 선임을 진행하고 있지만, 유영하 변호사 등처럼 적극적으로 박 전 대통령 입장에 서서 대응하리라곤 기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법조계 역시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 사임 결정이 알려진 직후 ‘박 전 대통령이 악수를 뒀다’는 평을 내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박 전 대통령의 선택이 최선이었을 것’이라는 전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 여론의 영향을 많이 받는 1심에서 박 전 대통령이 무죄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1심 재판을 장기화해 여론 등 외적인 요소들을 조금이라도 바꿔, 재판 결과를 긍정적으로 끌어내는 수가 가능하다는 풀이다.
가장 큰 변수는 단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적극적으로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8월 25일 1심(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항소하면서 사건은 서울고법 형사13부(정형식 부장판사)로 올라갔는데, 이 부회장이 구속 상태이기 때문에 2심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6개월 안에 재판을 끝내야 한다. 늦어도 내년 2월 20일까지는 선고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박 전 대통령 1심 결과보다 이 부회장 2심 결과가 더 빨리 나올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박 전 대통령의 구속이 연장되면서 만들어진 ‘시나리오’다. 구속 연장이 결정된 것은 10월 13일. 당초 16일 자정이 만기였으나 재판부의 구속연장 결정으로 최대 6개월 더 늘어났다. 내년 4월 16일까지 구속돼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인데, 박 전 대통령이 지금처럼 재판을 계속 거부할 경우 3월 말~4월 초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법조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부장검사는 “이재용 부회장의 2심 선고를 지켜보는 게 박 전 대통령에게 유리하다”며 “여론이 상대적으로 지지하는 이 부회장의 경우 법원이 ‘여론’에 휘말릴 수 있다”고 풀이했다. 정치권은 물론, 경제 매체들을 중심으로 언론들마저도 이 부회장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며 법원의 중형에 불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 그는 “내년 초가 되면 새 정부 등장에 따른 기대감만으로는 경제를 지탱하기 힘들기 때문에, 삼성과 같은 거대 기업의 투자 확대와 같은 지원이 필요하다”며 “청와대도 내심 이 부회장을 불구속으로 풀어주고 국가 경제에 기여하기를 기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8월 2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뇌물공여 등의 혐의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법조계 관계자는 “뇌물 사건은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준 사람만 유죄가 인정된 상황”이라며 “만일 준 사람이 없어지면 받은 사람도 없어지는 셈이 되기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을 꼭 처벌하고자 하면 유죄 판단 혐의를 ‘협박’ 정도로 바꿔야 하는 애매한 상황이라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선 부장검사는 박 전 대통령이 재판부를 압박하는 데도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구속이 연장된 것을 기다렸다는 듯 명분 삼아 움직였다”며 “우리나라 재판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나게 큰 사건을 하는 1심 재판부라고 생각해봐라, 피고인(박 전 대통령)이 재판을 거부한 채로 결과를 내면 반쪽 재판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피고인의 변론권도 반영하려 할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특히 오히려 시간을 번 효과도 있다며 “내가 재판장이라면 고등법원이 이재용 부회장의 2심 결과를 어떻게 선고하는지 다 지켜보고, 그 부분의 판단까지 내 재판에 반영해 박 전 대통령의 유무죄 여부와 양형을 결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판 흐름도 박 전 대통령에게 유리하다. 이재용 부회장의 2심은 1심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 법원 안팎에서는 “3~4개월 안에는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론이다. 2심 재판부도 이 부회장 첫 공판에서 “1심에서 이미 부른 증인은 최대한 다시 부르지 않겠다”며 빠른 재판 가능성을 시사했다.
하지만 이 같은 변수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는 불리하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박 전 대통령에게 적용된 혐의는 18개에 달하지만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삼성 이재용 부회장과 최순실·박 전 대통령으로 연결되는 뇌물수수 사건이기 때문. 또 박 전 대통령을 향한 성난 민심도 재판부는 고려할 수밖에 없다.
법원 관계자는 “각각의 재판부는 독립된 판단을 하고, 절대 대법원이나 법원행정처에서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판사라면 누구나 동의하지만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며 “이런 사건에서 박 전 대통령 재판부는 ‘유죄’ 이재용 부회장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해서 혼란을 자처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단죄 목소리가 높은 마당에, 재판 시기가 이상하게 맞물린다면 한 명에게만 무죄를 선고할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얘기다.
구속 만기를 엿새 앞둔 박근혜 전 대통령이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78차’ 공판을 마친 뒤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최준필 기자
박 전 대통령은 재판 거부를 통해 정치적으로 ‘투쟁의 장’을 얻었다. 구치소를 중심으로 박 전 대통령 측의 지지 세력들을 결집시킬 수 있게 된 것. 법원 관계자는 “앞선 6개월간의 재판에서 ‘억울한 게 많지만 묵묵히 피고인으로서 변론을 준비했지만 더 이상 법원을 믿을 수 없게 됐다’고 얘기한 대목에서 ‘이제 정치의 영역에서 싸우겠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아마 앞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지지 않을까 싶다”고 우려했다.
법무부 관계자 역시 “박 전 대통령이 꺼낸 얘기를 곰곰이 짚어보니, 이제 남은 것은 더 자극적인 반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스스로 신체에 해를 가한다든지, 몸이나 마음이 아픈 부분을 강조하는 등의 방법으로 구치소 안에서 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밖으로 보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의 향후 전략을 놓고도 여러 시나리오들이 나오지만, 법조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신중한 재판’ 흐름이 강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이런 사건은 재판부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준비한다. 그렇게 때문에 구속 기간 연장을 비롯, 재판 진행 과정도 그렇고 위법하게 흘러간 부분이 없지 않느냐”면서도 “재판부에는 꼬리표처럼 쫓아다닐 사건이기 때문에 재판부도 역사 앞에 당당한 결과를 내놓을 수 있기 위해 앞선 6개월보다 더 신중하게 접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
검찰 내부 자아비판론 왜? “살아있는 권력 눈치보기는 여전” “우리 회사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익명을 요구한 검찰 관계자) ‘여전히 정치적이고, 예리하고, 말을 잘 듣는다.’ 검찰 내에서 회사(검사들은 검찰 조직을 회사라고 부른다) 분위기를 물으면 나오는 평이다. 검찰에서 진행 중인 여러 사건을 통해 볼 때 변한 게 없다는 자아비판인데, 앞선 관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 640만 달러 수수의혹’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지켜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 수사를 앞두고 있는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이 17일 오전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열린 병무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기찬수 병무청장에게 질의를 하고 있다. 앞선 지난 15일, 자유한국당 정치보복대책특별위원회는 정진석 의원이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하자 맞불을 놓는 격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 640만 달러 수수 의혹을 검찰에 고발했다. 현재 정진석 의원 사건은 형사1부, 노 전 대통령 일가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에 배당된 상황. 이에 대해 한 검찰 관계자는 “형사1부는 명예훼손 전담 사건 부서라면, 형사6부는 이에 비해 하기 싫은 사건을 뭉개는 곳”이라며 “형사1부와 달리 형사6부에서 유명 정치인 사건을 ‘유죄’로 처벌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 처리 방향도 이미 나와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가 관심을 기울이는 수사는 신속·정확하게 진행되고 있다. 검찰은 남은 두어 달 동안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 등에 집중하겠다는 분위기다. 앞선 검찰 관계자는 “검사장 출신의 최윤수 전 국정원 2차장을 출국금지하는 등 수사가 국정원 외에 우병우 전 청와대 수석으로 다시 확대되는 분위기”라며 “앞선 정권 때처럼 하명 수사만 계속하다보니, 수사 피로도를 토로하는 검사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자연스레 수사력이 다 전 정권 때 사건들을 향해 있어 올해 검찰이 추가로 기업 상대 수사를 벌이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올해 안에 추가로 대기업 수사를 한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다”며 “검경 수사권 조정을 앞두고 경찰이 적극적으로 기업 수사에 나서고 있어, KAI(한국항공우주산업) 억지 수사 등으로 비판받았던 검찰이 기업들에 대한 수사를 더욱 주저하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