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미국의 금융 위기가 월가의 생활 풍경도 바꿔놓고 있다. | ||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뉴욕시 재정 수입의 35.9%가 바로 월가에서 나오며, 월가맨들이 얼마나 지갑을 여느냐에 따라서 뉴욕의 부동산 시장을 비롯한 경제가 울고 웃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번 금융 위기가 월가를 비롯해 뉴욕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최근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 사태로 인해 월가맨들의 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2010년까지는 뉴욕시 경제가 원상복귀되기는 힘들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정말 잔치는 끝난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이트클럽에 가면 300달러(약 35만 원)짜리 보드카 한 병쯤은 너끈히 주문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씀씀이를 줄여야 할 것 같다.”
23세의 한 젊은 월가맨이 푸념 섞인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사실 수억 원대의 연봉을 받는 그에게 이 정도는 ‘껌값’에 불과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월가 종사자들도 그랬다.
리먼브러더스에서 일했던 브라이언 건더슨(28)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뉴욕의 소비자 물가는 월가 사람들의 연봉에 맞춰서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싸구려 칵테일 한 잔에 15달러(약 1만 7000원)는 심하긴 했다”고 말했다.
최근 그는 비싼 클럽에 가는 대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파티를 열었다. 더 이상 쓸데 없이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다. 초대장에는 “아직 회사에서 잘리지 않았거나 펀드가 20% 이상 떨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맥주나 술을 직접 가지고 오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 이후 한바탕 휘몰아쳤던 폭풍이 지나가면서 월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허세를 부리거나 과소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지난 3월 베어스턴스 파산 후 맨해튼의 개인 주식회사로 옮겨 일하고 있는 델리아 로텐버그(25)는 “지금까지 월가에는 지나친 낙관주의와 거품이 만연했던 게 사실이다. 20대의 젊은 직원들은 겁 없이 온갖 사치품들을 신용카드로 긁고 다녔다. 명품 시계, 고급 승용차, 호화 아파트, 심지어 요트까지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고 비꼬았다.
뉴욕의 채용 및 자문회사인 ‘옵션스 그룹’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월가의 투자은행에 입사한 애널리스트들의 평균 초임 연봉은 보너스를 포함해서 12만 5000~15만 달러(약 1억 4000만~1억 7000만 원)였으며, 투자은행 조합원들의 경우에는 평균 25만~30만 달러(약 2억 9000만~3억 5000만 원)였다.
갑작스런 생활의 변화와 위기감에 정신과 병원을 찾는 환자들도 늘고 있다. 뉴저지에서 정신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로살린 S. 돌렌 박사는 “최근 들어 젊은 트레이더들과 은행 직원들의 방문 횟수가 늘었다. 월가의 젊은 직원들의 심리적 경향을 분석해 보면 오로지 화려한 뉴욕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또 최고가 되기 위해서 기꺼이 살인적인 근무시간과 스트레스를 견뎌왔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더욱 충격으로 와 닿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월가에 있는 뉴욕 증권거래소. 연합뉴스 | ||
가령 월가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스텔라 맥주의 판매량은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신청을 했던 월요일인 지난 15일에 일주일 전보다 무려 69%가량 증가했다. 또한 AIG가 파산 직전에 처했다는 뉴스가 보도된 화요일에는 88%, 그리고 다우존스가 하루 만에 5% 가까이 폭락했던 수요일에는 69% 증가했다.
하지만 이처럼 중저가의 레스토랑이나 술집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는 반면, 고급 레스토랑들은 월가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겨 울상이다. 뉴욕주 레스토랑협회 회장인 척 헌트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뉴욕 시민들이 외식을 잘 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고급 레스토랑을 찾는 고객들도 유로화로 계산하는 유럽 사람들이다”며 어려운 사정을 토로했다.
뉴욕의 부유층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부유층이 지갑을 닫았으니 예술, 패션, 고급 승용차, 고급 레스토랑, 성형외과 등도 덩달아 불황을 맞았다.
한동안 붐을 이뤘던 성형외과 시장의 경우를 보자. 뉴욕의 전력 회사인 ‘콘솔리데이티드 에디슨’사에 근무하는 남편으로부터 50세 기념 생일 선물로 1만 5000달러(약 1700만 원) 상당의 주식을 팔아서 주름살 제거 수술을 받기로 약속했던 아넷 푸치는 최근 주식이 폭락하자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1200달러(약 140만 원)를 들여 보톡스 시술을 받는 데 만족해야 했다.
또한 뉴욕의 폴 로렌스 성형외과 전문의는 “최근에는 주름살 제거용인 레스틸렌 주사를 반만 놓아 달라고 부탁한 고객도 있었다”며 황당해했다.
귀금속 시장도 울상이다. 개인 고객을 상대로 고가의 귀금속만을 구매 및 판매 대행하는 패트리샤 햄브렛은 최근 파이낸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한 고객이 부인의 결혼기념일 선물로 당초 5만 달러(약 5700만 원)를 지불할 생각이었지만 얼마 전 예산을 2만~2만 5000달러(약 2300만~2800만 원)로 대폭 줄였다고 말했다. 남편이 금융업에 종사한다는 또 다른 여성 고객은 3만 달러(약 3400만 원) 짜리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사려다가 결국 구매를 취소하기도 했다.
한편 보석 디자이너인 타니 탕은 “8월 매출이 전달 대비 50%가량 감소했다. 매장을 찾는 고객 수도 75%가량 줄었다. 하는 수 없이 얼마 전부터는 개업 이래 처음으로 25% 세일에 들어갔다”고 한숨을 쉬었다.
반대로 금융위기 덕에 수혜를 입은 업종도 있다. 마사지숍과 중고품 가게, 그리고 보석 판매 대행업체가 그렇다. 마사시숍의 경우, 불확실한 미래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작은 위안을 받고자 찾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으며, 많아야 하루에 4~5통의 문의전화가 오던 한 보석 판매 대행업체에는 최근 들어 하루에 40통 이상의 전화가 폭주하고 있다. 대부분이 고가의 귀금속을 서둘러 매각해서 현금으로 보유하려는 부유층들이다.
당분간 월가 전체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쉽게 걷히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이런 ‘절약 풍토’도 덩달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