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일본의 역대 총리 중 이 정도로 깊은 실망과 싸늘한 눈초리 속에 탄생한 총리가 또 있을까. 오죽하면 같은 자민당 내에서도 아소 다로를 마땅치 않아 하는 무리가 너무 많아 ‘짜고 치는 총재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후보가 다섯 명이나 나서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언론 또한 취임하기 전부터 “자민당에는 더 이상 인재가 없다” “은퇴하지 않고 자민당에서 버티기만 하면 누구나 총리가 된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 아소 다로에 대해 언론에 알려진 내용만 봐도 자칫 큰 스캔들로 발전할 소지가 너무 많아 그가 어떻게 일본 총리의 자리에 올랐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 때문인지 일본 언론은 아소 총리가 최단명 정권의 기록을 갱신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
아소 다로라는 인물은 상대방을 비웃는 듯한 비뚤어진 입술로 폭언에 가까운 망언을 자주 해 물의를 일으킨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정치인이다. 그의 외모와 종종 내뱉는 품격 없는 발언만 보면 불한당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일본에서 유명한 정·재계 명문가의 출신이다.
일본 규슈 지방에서 알아주는 ‘아소 재벌’의 출신으로 아소 다로 본인도 ‘아소시멘트’의 사장을 지냈다. 아버지 아소 다카키치가 경영하던 ‘아소탄광’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포로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아소 총리는 “일제 시대 때 강제 징용은 없었다”고 강변하는 극우파의 대표적 인물로 성장했다.
정계 쪽으로는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외손자이면서 스즈키 젠코 전 총리의 사위이기도 하다. 여동생인 아소 노부코는 일본 왕실에 시집을 가서 왕족의 일원이 됐다. 그야말로 정계, 재계, 왕실과 연결되어 있는 대표적 명문가 출신으로 그 역사가 18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자신의 출신 환경에 대해 본인은 “부자의 괴로움을 보통 사람들이 알 리가 없다” “총리의 가족이라고 좋을 게 없다” “나는 부모에게 방치되어 자랐다”는 등 자랑인지 겸손인지 알 수 없는 발언을 거듭해 여론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모든 것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 진짜 세상을 체험한 적 없이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그의 왜곡된 역사 인식과 차별적인 발언의 배경이 어쩌면 그의 한정된 세계관에 있었던 건 아닐까.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아소 다로라는 이름을 몇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이름을 달라고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이 한글 보급에 공헌했다” “일본 식민지 시절의 의무교육 덕분에 대만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다”는 등 온갖 망언을 일삼은 ‘망언의 달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입’이 다른 나라의 심기만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자민당 총재선거가 한창이던 9월 14일 나고야 역에서 열린 가두연설회에서 아소 총리는 8월 말에 오카자키를 덮친 호우를 거론하면서 “안조나 오카자키였기에 망정이지 나고야였다면 큰 홍수가 일어났을 것”라고 말했다. 지역 차별적인 발언에 안조와 오카자키의 시민들이 발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소 다로 총리의 ‘망언’은 일본 내에서도 유명해서 언론에서는 “그의 실언은 병적 수준”이라고 혀를 찰 정도다. 이런 그의 ‘지병’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88년 발행된 자신의 에세이집 <이론(異論) 여러 가지 다로>에서 남녀 고용기회 균등법을 다룬 장에서는 남녀의 완력의 차이를 예로 들며 “전쟁이 난다면 여성은 종군 간호사 정도가 아니면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 발언을 싣기도 했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 1975년에 발행된 <아소 백년사>에는 당시 ‘아소시멘트’ 사장이었던 아소 총리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여기서 그의 특이한 경영론과 경영자론을 엿볼 수 있다. 때마침 ‘미나마타병’과 ‘이타이이타이병’ 등 공해문제가 부각되면서 일본의 기업들의 책임론이 대두되던 때였다. 그때 아소 총리는 “공해가 문제가 될 정도로 일본의 경제가 발전했다”고 감탄(?)하며 “‘이기면 장땡’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동기가 불순해도 성공하면 옳은 것이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의미로 정신분열증이나 이중인격자가 아니라면 좋은 경영자가 될 수 없다”는 논지를 펼쳐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소 총리의 고향인 후쿠오카 현의 이이즈카에 가서 치카코 부인(58)에 대해 물어보면 다들 “아소 총리보다 훨씬 낫다”고 입을 모은다. 입만 열면 말썽인 남편과 비교할 때 화술도 뛰어나고 누구를 만나건 그에 맞는 화제를 미리 준비해오는 센스가 있다는 것이다.
치카코 부인은 스즈키 젠코 전 총리의 셋째 딸로 33세 때 당시 43세였던 아소 총리와 결혼했다. 명문가 출신답지 않은 소박한 성격으로 언제나 청바지에 티셔츠나 치마와 블라우스 등 편안한 차림으로 선거구를 돌아다니며, 때로는 장화를 신고 논에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치카코 부인을 두고 유권자들은 “아소 총리에게는 아까운 부인”이라며 오히려 부인 쪽에 더 점수를 주고 있다. 그러나 아소 총리에게는 오랫동안 여성 문제가 뒤따라 다녔다. 한때는 4명의 애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한 주간지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중 도쿄의 고급 환락가인 롯본기에 있는 한 클럽의 미녀 마담과의 관계는 거의 기정사실화되어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 클럽에 다니는 다른 단골손님들의 입소문을 통해 예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마담도 언론의 취재에 “옛날부터 친한 사이”라며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았다. 아소 총리는 지금도 거의 매일 그 클럽에 들르는데, 그의 정치자금 관리단체의 수지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부터 3년 동안 그 클럽에 지불한 돈이 약 1400만 엔(약 1억 9000만 원)이나 계상되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마담이 살고 있는 초호화 아파트가 자신의 측근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소 총리는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