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변호사회관 조영래홀에서는 ‘남배우 A’ 유죄 판결과 관련한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임준선 기자
‘남배우 A 성폭력 사건’은 2015년 4월 한 저예산 영화의 가정 폭력 장면을 촬영하던 도중, 남배우가 상대 여배우를 추행해 전치 2주의 부상을 입힌 사건이다. 지난 10월 16일 연기경력 20년의 배우 조덕제(49)가 자신이 남배우 A라고 밝혔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조덕제 성추행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문제의 장면은 부인(피해 여배우)의 외도를 의심한 남편(조덕제)이 격분해 폭력을 휘두르다가 겁탈하는 장면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덕제가 피해 여배우의 상의와 속옷을 찢고, 하의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추행했다는 것이 여배우 측의 주장이다. 이 상황을 피하려다가 전치 2주에 해당하는 좌상과 찰과상을 입었기 때문에 조덕제의 죄명은 ‘강제추행치상’이 됐다.
1심과 2심에서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은 동일했다. “문제의 신에서 조덕제는 감독의 지시를 받고 연기했다”는 것. 다만 1심에서는 이 연기가 “배역에 몰입한 연기였고, 업무상 행위이므로 성폭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2심에서는 반대로 “지시 이상의 행위였으며 여배우와 합의되지 않았으므로 정당한 연기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촬영 전 감독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은 피해 여배우 측도 인정한 사실이다. 여배우 측은 “당시 촬영에서 감독님이 ‘이 영화는 에로는 아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나도록 강하게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문제의 영화는 15세 이상 관람가이기 때문에 노출이 심하게 드러나거나 과도하게 선정적인 장면은 촬영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촬영할 때만큼은 감독이 여배우에게도 “에로의 느낌이 나는 분위기”를 떠올리게끔 연기를 지시했다는 것.
배우 조덕제가 자신을 ‘남배우 A 성폭력 사건’의 A라고 밝히면서 기자들에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사진=tvN
조덕제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첫 영화 촬영 날 현장에 온 조연 배우가 감독의 세세한 지시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연기를 할 수 있겠나”라며 “지시와 상황을 모두 감독으로부터 전해 듣고 그 범위 내에서 연기를 한 것이고 그 사실은 여배우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속 조덕제가 맡은 역할이 의부증 환자에 상습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었고, 문제의 신은 부부 강간의 장면이었다. 여기서 조덕제가 밝힌 감독의 연기 지시 키워드가 충격적이다. “짐승처럼” “미친놈처럼” “(부인을) 사육하는 것처럼” 지난 10월 25일 <디스패치>가 공개한 영화의 메이킹 영상에는 감독의 이런 지시와 그가 원했던 ‘그림’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메이킹 영상은 영화 제작 장면을 담은 영상이다. 신을 찍기 전 감독과 배우들의 조율, 스태프들의 작업 상황 등이 촬영된다. 이 메이킹 영상은 조덕제가 기소 전 수사기관 조사에서 증거로 제출한 자료기도 하다. 조덕제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메이킹 영상에 촬영 전후 상황이 다 담겨 있어서 검찰에서도 그게 있으면 무죄 입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 영상을 조덕제 측에서 언론에 공개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진실이 왜곡되는 게 답답해서 메이킹 영상을 공개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대법원 재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재판 자료들을 공개하는 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낳을 것 같아 주저하고 있었다”라면서도 “다만 이미 공개가 됐다면 보신 분들이 진실을 알아주실 거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메이킹 영상 속에 장훈 감독은 조덕제에게 이렇게 연기 지시를 내린다. “그냥 옷을 확 찢어버리는 거야. (아내는) 몸을 감출 거 아니에요. 그 다음부턴 마음대로 하시라니까, 미친놈처럼.”
피해 여배우는 ‘남편의 상습 가정폭력에 무력해진 부인’의 역할이었다. 장 감독은 이 신에서 여배우가 “강간당하는 기분이 들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사건에서 피해 여배우가 추행의 근거로 들었던 사실 가운데 하나는 “조덕제가 상의와 속옷을 찢고 상체를 만졌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당초 합의했던 연기 내용과 달랐다는 것이다.
공개된 영화 메이킹 영상 속에서 감독이 조덕제에게 문제의 신을 연기 지시하는 장면이 촬영됐다. 감독은 조덕제의 등 뒤에서 가슴을 움켜쥐는 자세를 취하며 “마음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사진=유튜브 ‘신비한 백과사전’ 영상 캡처
“상체 샷만을 촬영하기로 했기 때문에 하체를 만질 이유가 없는데 추행했다”는 피해 여배우의 주장도 메이킹 영상 속 내용과 다르다. 영상 속에서 장 감독은 “그냥 옷을 확 찢어버리는 거야. 바지서부터, 바지서 몸을 감출 거 아니에요, XXX(여배우)가”라고 말하며 하체 쪽을 향해 손동작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메이킹 영상이 공개되고 나서 여론은 또 다시 뒤집어졌다. 지난 10월 24일 열린 ‘항소심 유죄 판결 환영’ 기자회견에서 피해 여배우의 육성이 담긴 절절한 편지가 공개되면서 모아졌던 대중들의 관심은 “대법원 판결을 지켜보자”에서 더 나아가 “여배우와 감독이 더 명확하게 밝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특히 제3자라는 이유로 침묵을 지키며 방관해 왔던 감독이 사실은 3자가 아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감독에게도 책임의 화살을 돌아가고 있는 분위기다.
문제는 메이킹 영상의 공개로 여론은 바뀔지언정 대법원의 판단은 바뀌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영상은 이미 조덕제 측의 증거자료로 검찰 수사와 1심, 2심에서 모두 활용됐다. 조덕제가 피해 여배우에게 행한 행위가 감독의 지시에 따른 연기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자료였으나 2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심 재판부도 메이킹 영상을 확인하고 감독의 지시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은 맞다. 그러나 “감독이 직접적으로 피해자의 가슴을 만지고 피해자의 바지 속으로 손을 넣으라는 것은 없었다”라며 지시 내용과 조덕제의 행위는 별개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대해 피해 여배우 측을 지지하는 단체 측 조인섭 법무법인 신세계로 변호사는 “당시 재판부가 피고인에게 ‘감독이 (여배우의) 가슴을 만지라고 했느냐’ ‘바지 안에 손을 넣으라고 했느냐’고 질문하자 피고인이 모두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감독의 지시와 연기가 동일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에서 1, 2심에서 제기된 내용이 아닌 새로운 증거가 등장하지 않는 한 여전히 불리한 것은 조덕제라고 바라보는 법조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장훈 감독은 조덕제에게 “미친놈처럼 마음대로 연기를 해라”라고 요구하며 행동으로 지시했고, 이 신을 찍고 ‘컷’을 외쳤다. 신에 대해 불만을 표한 것은 여배우뿐이었다. 그렇다면 감독은 이 신을 보고 ‘만족할 만한 그림이 나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조덕제의 연기가 감독의 지시에 부합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한 감독 역시 이 사건에 대해서 제3자로만 남아있을 수는 없다.
더욱이 장훈 감독은 피해 여배우와 조덕제에게 각각 다른 연기 지시를 내린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장 감독은 여배우 측에는 “어깨부분의 멍 분장을 제외한 노출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조덕제에게는 “옷을 찢어버려라”고 지시했다. 두 배우가 동시에 있는 자리에서 이뤄지지 않은 이 같은 별개의 지시가 양측의 합의에 따른 연기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피해 여배우가 조덕제에 대해서만 혐의를 묻고 있기 때문에 감독의 지시는 마지막 대법원 재판에서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피해 여배우를 지원하고 있는 한국여성민우회 관계자는 “지시를 내린 것은 장훈 감독이 맞지만 현재로서는 행위자이자 직접 가해자인 조덕제에 대해서만 법적 책임을 묻고 있다”라며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는 피해 여배우가 결정해야 할 문제이지만 아직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그 다음 논의를 거쳐 진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일요신문>은 어렵게 피해 여배우와 통화를 할 수 있었지만 그는 “현재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을 다니고 있다”라며 앞으로의 대응은 모두 한국여성민우회 여성연예인인권지원센터를 통해 밝히겠다고만 말했다. 장훈 감독은 아예 휴대전화를 꺼놓고 모든 연락을 피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