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카노호(왼쪽)는 <주간겐다이>와 인터뷰를 통해 가스가니시키와의 경기가 얼마나 부자연스러웠는지 사진과 함께 설명했다. | ||
하지만 악재는 끊이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한 신참선수가 린치에 가까운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해 사망한 사건이 밝혀지면서 스모계에 만연한 폭력과 협박의 실체도 드러났다. 그러던 중 올해에는 스모 선수들의 대마초 흡입 사건까지 터졌다.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스모계의 위상이 다시 한 번 추락한 것은 최근 일본의 대중지 <주간겐다이>가 끈질긴 취재 끝에 발굴해낸 기사 때문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동안 쉬쉬해왔던 스모계의 승부 조작설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주간겐다이>는 지난해 초부터 끈질기게 ‘스모계에 승부 조작이 만연하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에 대해 일본스모협회와 아사쇼류 등 32명의 스모 선수들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면서 <주간겐다이> 측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고, 총 7억 8000만 엔(약 115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벌였다.
이 재판은 처음에는 승부 조작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면서 <주간겐다이>에 불리한 듯 보였다.
그러나 올해 8월 스모 선수들의 대마초 흡입 사건이 터지면서 재판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건의 발단은 러시아 출신의 와카노호(20)가 대마취급법 위반으로 경찰에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와카노호는 이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고 곧 해고 처분을 받았다.
와카노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몇 번이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 다시 스모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비치며 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본스모협회는 그의 호소를 무시했다.
이런 일본스모협회의 태도에 서운함을 느낀 와카노호가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만 해도 “다른 선수들은 깨끗하다” “스모를 사랑한다”며 스모계를 감싸는 모습을 보였다. 언젠가는 일본스모협회가 ‘의리를 지킨’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스모협회가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모습에 실망한 그는 “내가 사랑하는 스모는 ‘깨끗한 스모’이지 ‘부패한 스모’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스모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진실을 밝히는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주간겐다이>와 일본스모협회의 승부 조작 재판에서 증언을 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와카노호는 9월 29일 기자회견을 열어 스모계에 승부 조작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이와 함께 <주간겐다이>와의 독점 인터뷰를 통해 스모계에 널리 퍼져 있는 승부 조작과 은밀한 돈거래, 협박과 폭력이 난무하는 스모계의 실상을 폭로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의 스모는 프로 스포츠가 아니라 ‘마피아’가 마음대로 승부를 조작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하며 자신이 가담한 승부 조작 시합과 상대방 선수의 실명까지 모두 공개했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와카노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가스가니시키(왼쪽),고토오슈. | ||
와카노호는 대선배의 부탁을 거절할 경우 다른 선수들로부터 ‘귀여움’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귀여움’이란 몸을 부딪쳐서 상대방을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는 고된 연습을 20~30분 이상 계속하는 것을 가리키는 스모계 용어다. 매우 강도 높은 훈련으로 보통 상급 선수들도 5분 이상은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인도 다른 도장에 연습하러 갔다가 ‘귀여움’을 받은 경험이 있는 와카노호는 선배 선수의 승부 조작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와카노호가 시합에서 일부러 지기로 동의하자 가스가니시키는 어떻게 져야 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 후 가스가니시키는 ‘보답’으로 와카노호와의 시합에서 일부러 져주기도 했다고 한다.
2008년에도 승부 조작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우승 경력도 있는 불가리아출신의 고토오슈가 “100만 엔(약 1500만 원), 아니 150만 엔(약 2200만 원)이라도 주겠다”며 접근해왔다. 와카노호가 거절하자 “(승부 조작은) 다들 하는 일이다. 금방 익숙해질 것”이라는 회유와 함께 “거절하면 선배들의 ‘귀여움’을 받아 부상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협박을 번갈아 했다. 어쩔 수 없이 와카노호가 동의하자 역시나 어떤 식으로 져야 하는지 상세한 지시가 뒤따랐다. 이런 식으로 한두 번 승부 조작에 가담하면서 선수들 사이에 그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이내 점점 더 많은 승부 조작 요구가 몰려오게 되자 결국에는 발을 뺄 수조차 없어졌다.
<주간겐다이>와 일본스모협회의 승부 조작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와카노호의 폭로는 앞으로의 재판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앞서 대마 사건으로 해고 처분을 받은 로호와 하쿠로잔의 행보다. 두 사람은 당초 승부조작설을 보도한 <주간겐다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스모 선수 32명의 일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이번 재판에서 빠질 것을 신중하게 검토 중이다. 이들의 변호인은 “두 사람은 와카노호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감명을 받아 자신들도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와카노호와 마찬가지로 일본스모협회에서 밀려난 두 사람이 일본스모협회에 불리한 증언을 할 경우 재판 결과를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