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A 씨(여·27)는 대학 시절 같은 학교 친구였던 B 씨(여)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진다. 흔히 ‘야동’이라 불리는 성인용 영상물에 B 씨가 등장한 것. 영상에는 여성의 소속 학교를 비롯한 인적 사항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전형적인 ‘리벤지 포르노’(보복성 사생활 촬영물)의 피해자가 된 B 씨는 영상이 퍼진 뒤 계속되는 2차 피해로 다니던 학교는 물론 한국을 뜰 수밖에 없었다. A 씨는 “영상이 퍼지자 학교 남학생들도 그 영상을 공유하는 등 2차 피해가 심했다”며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지방경찰청이 지난 10월 17일부터 30일까지 국내 웹하드 P2P 사이트에 올린 음란물 위장 영상 일부분.
“○○녀 모텔에서” “○○녀 화장실 몰카” 등은 이제 국내 웹하드 및 P2P 사이트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제목이다. 그동안 이런 제목의 영상들은 랜선을 타고 끊임없이 퍼져나가고 소비돼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카메라 등 이용촬영죄’의 적발 건수는 지난 2011년 1535건에서 2016년 5185건으로 5년 사이 3배 넘게 급증했다. 올해도 7월 말까지 3286건이 발생했을 만큼 불법촬영범죄는 급격하게 늘고 있다. 몰카범죄로 구속된 인원도 같은 기간 30명에서 155명으로 5배 급증했다. 몰카범죄 사범으로 입건된 인원은 올해에만 3239명(7월말 기준)으로 집계돼 증가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몰카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최근 경찰이 색다른 방법으로 디지털 성범죄 단속에 나서 한국 사회의 성문화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10월 31일 부산지방경찰청에 따르면 부산 경찰은 디지털 성폭력 범죄 대책의 일환으로 ‘경고 메시지’를 담은 위장 음란물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10월 사이 P2P 사이트에 직접 올렸다. 영상물은 ‘화장실편’, ‘탈의실편’ 등 각기 다른 상황을 주제로 만들어졌다.
<일요신문>이 확인한 자료를 보면 영상의 도입부는 일반적인 몰래 카메라 영상과 동일하다. 탈의실 편의 경우 옷을 갈아입고 있는 한 여성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후 상의를 탈의하려는 순간 이 여성은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여성의 얼굴은 섬뜩하게 변해있었고 마치 그 모습은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물을 보는 듯한 착각까지 들게 한다. 이내 ‘몰카에 찍힌 그녀를 자살로 모는 건 지금 보고 있는 당신일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 문구가 나온다. 그리고 ‘경찰이 이 사이트를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가 뒤를 잇는다.
화장실 편도 내용 전개는 비슷하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한 여성이 카메라에 잡힌다. 이 여성이 일을 마친 후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문 뒤에서 흰 소복을 입은 여자가 무서운 눈초리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이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경고 문구가 흘러나온다. 이 같은 영상은 ‘화장실’, ‘탈의실’뿐만 아니라 지하철 등 다양한 주제로 기획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영상 후반부에 ‘부산지방경찰청’ 로고와 함께 상세한 설명을 기재해 놨다. 영상에서 경찰은 “이 영상은 불법촬영물(일명 몰래카메라)를 다운받아서 시청하는 것이 피해 여성의 수치심과 자살로까지 이어짐을 알리고자 제작됐다”라고 설명한다. 이어 “불법 촬영물이 유통되는 P2P·웹하드 사이트에 업로드됐고 충격적인 효과 및 장면은 경각심을 주기 위한 연출임을 알려드린다”고 덧붙였다.
영상 후반부에서 경찰은 “이 영상은 불법촬영물(일명 몰래카메라)를 다운받아서 시청하는 것이 피해 여성의 수치심과 자살로까지 이어짐을 알리고자 제작됐다”라고 설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같은 영상은 국내 파일공유사이트 12개 업체를 대상으로 지난 10월 17일부터 30일까지 업로드됐다. ‘탈의실편’ ‘화장실편’ 등을 비롯해 다양한 경고 영상들이 매일 170개씩 올라왔다. 이와 관련 경찰 관계자는 “몰카를 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제작된 것”이라며 “2주 동안 불법 몰카를 보려던 2만 6000명이 경고 영상을 다운로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고영상이 업로드된 파일공유 사이트의 불법몰카 유통량이 11%까지 감소되는 효과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음란물 단속에 나선 경찰은 부산이 처음이지만 같은 방식의 캠페인은 과거에도 디지털범죄 피해구제 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돼 왔다. 디지털성폭력대항단체 DSO(Digital Sexual Crime Out)도 얼마 전 시청하는 행위조차 또 다른 불법 영상물 제작 및 공급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에서 시청하지 말자는 취지의 ‘그만해 시청강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는 불법 음란물을 모니터링해서 신고하거나 불법 음란물을 시청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영상을 다운로드 사이트에 업로드하는 프로젝트다. 이번 부산 경찰이 진행한 캠페인과 궤를 같이 한다. 영상에는 보는 사람이 깜짝 놀랄 만한 사진과 함께 음란물 시청이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캠페인의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한계점을 지적했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 대응센터 대표는 “‘탈의실’ ‘화장실’ 등 누가 봐도 몰래 카메라라고 인지되는 그런 영상물을 보려고 했을 때 ‘경찰 마크’나 ‘경고 문구’가 직접 뜨면 충분히 ‘보면 안되겠구나’하는 경각심을 줄 수 있다”며 “범죄를 적발하는 경찰이 직접 나서 이런 캠페인을 벌이면 인식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피해구제 단체 관계자는 “P2P에는 도촬 형태의 몰카보다도 포르노 형태의 불법 촬영물이 절대 다수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따져봤을 때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며 “좀 더 본질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웹하드·P2P 사이트 운영업체들에 대한 관리·감독도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 대표는 “현재 웹하드 운영 업체가 음란물을 필터링해야 하는 법률이 마련돼 있지만 제대로 적용되지 않고 있다”며 “경찰이 이런 부분까지도 먼저 찾아서 관리감독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디지털 성범죄 예방에 더 효과가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