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유행정보지 <트렌디>는 최근호에서 2008년의 경제 불황을 뛰어넘고 히트를 기록한 상품들을 분석하고, 다가오는 2009년 시장의 판도를 미리 알아볼 수 있는 히트 예상 상품과 키워드를 소개했다.
# 올해 소비 패턴의 변화
2008년에 갑작스럽게 닥친 세계적 경제 불황은 소비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버블 경제가 붕괴한 후에도 종전의 소비적인 생활을 지켜온 사람들조차 ‘값싸고 질 좋은 것’을 찾기 시작했다. 유통업체나 대형마트에서 저렴한 가격에 독자적으로 선보이는 ‘PB(Private Brand)’ 상품들이 화장지나 가공식품, 의류 등의 소비재를 중심으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환경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졌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유기농’이나 ‘친환경’이라는 이름이 붙은 상품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일부를 위한 시장이었을 뿐 대다수의 서민들과는 별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중국산 식품과 공산품들의 위험성이 알려지면서 일상적으로 먹고 입고 사용하는 물건들의 안전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그와 동시에 원유값까지 폭등하면서 자가용을 두고 자전거를 타거나, 냉난방비를 줄이기 위한 에너지 절약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
다음에 소개할 2008년의 히트상품을 보면 소비 패턴의 큰 흐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1. 서민 프리미엄 상품
주머니가 가벼워지면 마음까지 위축되기 마련이다. 평소에는 바짝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더라도 가끔은 스스로에게 작은 사치를 허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더구나 돈을 많이 쓰지 않고 럭셔리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이런 소비자들의 심리를 간파한 것인지 2008년 일본에서는 이른바 ‘서민 프리미엄’ 상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패스트푸드 체인인 ‘맥도날드’의 ‘프리미엄 로스트 커피’다.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서 우선 비싼 커피부터 끊어야 했던 사람들이 싼 가격에 품질은 커피전문점 못지않은 ‘맥도날드’의 커피에 몰리기 시작했다. ‘프리미엄 로스트 커피’는 입소문을 타고 발매 6주 만에 3000만 잔이나 팔렸다. 비록 지갑은 얇아졌을망정 이미 고급화된 입맛까지 바꿀 수 없었던 소비자들에게 단돈 100엔(약 1440원)을 내고 마실 수 있는 제대로 된 커피의 유혹은 대단했다.
잠깐이나마 기분만이라도 부자가 된 듯한 만족감을 주는 ‘현실도피형’ 상품도 인기를 끌었다. 완구회사 ‘반다이’가 출시한 ‘버블리 버블 베스’는 지폐 모양 입욕제로 출시 한 달 만에 70만 개가 팔리는 기록적 매출을 올렸다. 1만 엔짜리 지폐처럼 생긴 입욕제를 욕조에 띄우고 담그고 있으면 고단한 현실을 잊을 수 있어서인지 특히 어른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지폐 입욕제가 히트상품이 되자 지갑 모양 케이스에 든 지폐 모양 기름종이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2. 재미+안전 ‘쿠킹토이’
중국산 식품 파동으로 시작된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염려는 의외의 업계에 호재로 작용했다. 가공식품 구매를 줄이고 직접 재료를 사서 집에서 만들어먹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가정용 조리도구의 수요도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게 요리를 만들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쿠킹 토이’가 인기를 끌었다. 김과 밥, 원하는 재료를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미니 김밥이 말려나오거나 밀가루와 물을 넣으면 알아서 반죽이 되어 메밀국수나 우동 면발을 만드는 기계 등 실제로도 조리 과정을 단축시켜주는 기능이 있어 어른들과 아이들 모두에게 어필한 것이 히트의 이유였다. ‘쿠킹 토이’가 인기를 끌면서 집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젤리를 만드는 등 다양한 제품이 속속 출시됐다.
3. 심플한 에코상품
원유 값 폭등은 당시 아직 ‘선택 사항’이었던 친환경 상품들의 소비를 유도했다. 석유나 전기 사용을 줄이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에너지 절약 상품이 인기를 끌게 됐고, 한발 더 나아가 에너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을 남긴 단순명쾌한 상품들이 뜨기 시작했다. 이 상품들 중에는 아날로그 시대의 추억을 자극하는 것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발이나 이불 속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한 핫팩이다. 그러나 인기를 끈 것은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사용하는 젤 타입의 최신형 핫팩이 아닌 철통에 뜨거운 물을 넣어 사용하는 복고풍 탕파(湯婆)였다. 일부 상점에서는 겨울이 되기도 전에 품절이 된 제품도 있을 정도다. 또한 물에 적시면 20시간 동안 차가운 느낌이 지속되는 스카프 등이 냉방비를 줄이고 여름을 나기 위한 제품으로 히트를 기록했다. 2008년의 매출은 65만 개로 처음 출시된 2006년의 4만 5000개보다 14배 이상 올랐다.
그밖에는 직사광선에 6~10시간 정도 놓아두면 40분 동안 통화가 가능한 전기를 생산해내는 태양열발전 휴대폰 충전기 ‘솔라 차지 에코’도 환경 보호와 함께 실용성을 겸비한 제품이다.
2008년 새롭게 등장한 절약 소비 패턴과 에코 붐은 2009년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경기의 불안정한 상승과 하락이 몇 번이나 반복되면서 꽁꽁 얼어붙은 소비 심리는 경기가 좋아진다고 해서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기업들도 갖가지 궁리를 하고 있다. 단순히 가격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진화하고 있는 ‘짠돌이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 수 없기 때문이다. 차별화를 노린다면 싼 가격과 좋은 품질은 기본이고 ‘+α’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재미가 됐건 편리함이 됐건 혹은 건강이 됐건 차별화된 ‘무언가’를 내세울 수 없다면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1. ‘화젯거리’로 공략
일본 기업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는 ‘소비에 무관심한 20대’라고 한다. 경제 불황의 시기에 태어나고 자란 현실적인 세대로 매우 깐깐한 소비층이다. 이들은 술도 마시지 않고, 자동차에도 별 관심이 없으며, 인터넷을 통해 웬만한 상품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상품평이 나쁜 제품은 구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약점(?)은 있다. 인터넷 블로그나 휴대폰 홈페이지 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화젯거리’는 매우 중요하다. 화제가 되고 있는 상품을 구입하고 사용함으로써 다른 구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혹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제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함으로써 화제를 직접 만들어낼 때의 만족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2009년 화제를 몰고 올 상품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일단 ‘맛이 변하는 컵라면’이라고 하면 화젯거리로 충분하다. 일본의 식품회사 ‘도요스이산’은 ‘두 번 맛있는 라면, 진한 돼지뼈 육수→크리미 카레’를 11월 중순에 발매할 예정이다. 일단 돼지뼈 육수 맛의 라면을 반쯤 먹다가 특수 양념을 첨가하면 부드러운 카레 맛으로 바뀌는 컵라면이다. 이런 ‘변신 컵라면’은 화제성은 물론, 하나의 컵라면으로 두 가지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일석이조’ 효과로 큰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블로그 세대는 뭐든 사진으로 찍어 기록을 남기고 자신의 공간에 올리는 습성이 있다. 휴대폰 카메라의 기능이 향상되면서 잠시 주춤했던 디지털 카메라 업계가 새로운 기능으로 무장하고 소비자들을 공략할 준비를 끝냈다. 기존의 카메라폰이나 똑딱이 디카의 기능에 한계를 느낀 소비자들이 더 멋지고 특이한 사진을 찍기 위해 새로운 카메라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의 DSLR 카메라는 부피가 크고 무겁다는 단점이 있어 일상적인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나 2008년 가을 카메라 관련 전시회에서 ‘올림푸스’가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인 모델을 발표했다. 본체의 크기가 120㎜×65㎜×32㎜로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 앞으로 DSLR 카메라의 보급에 기여할 전망이다. 이에 앞서 ‘파나소닉’은 크고 무겁고 조작법이 어렵다는 기존 DSLR 카메라의 단점을 보완한 ‘DMC-G1’을 출시했다. 크기는 124㎜×45.2㎜×83.6㎜에 무게는 불과 385g으로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벼운 DSLR 카메라다.
한편 ‘후지필름’은 3D 촬영이 가능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하여 2009년 상품화할 예정이다. 두 개의 렌즈가 동시에 촬영한 영상을 합성하여 입체적인 사진을 만들어내는 원리다. 손쉽게 3D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콘셉트는 흥미롭지만 입체감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렌즈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크기를 얼마나 작게 만들 수 있는지가 남아있는 과제다.
반대로 풀어야할 과제를 과감히 드러내는 ‘발상의 전환’으로 화제를 모으는 제품도 있다. 벽걸이 TV를 설치하는 데 따르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자 ‘도시바’는 벽에 거는 것이 아닌 벽에 ‘걸쳐놓는’ TV를 선보였다. ‘레그자(REGZA)’는 두께 48㎜의 유리판 상부에 액정 화면을 내장한 제품으로 벽에 비스듬히 걸쳐놓고 사용하며 평소에는 전신거울로 사용할 수 있다. 목조건물이 많아 벽의 강도가 약해 벽걸이 TV를 설치할 수 없는 일본의 주택사정과도 맞아떨어져 “벽걸이 TV보다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에코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친환경 상품’이라고 하면 다소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에코가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 되면서 2009년에는 환경도 보호하면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 많이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특히 리필과 재미라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된 제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리필용 커피 페트병인 ‘네스카페 차지’는 커피가 리필되는 순간을 직접 볼 수 있게 만들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또한 컵라면으로 유명한 ‘닛신’은 유리로 만든 컵라면 ‘글라스컵’을 선보였다. 유리로 된 컵라면 용기는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며, 진공 포장된 라면을 용기에 넣고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면 된다. 다양한 종류의 라면이 구비되어 있어 골라먹는 재미도 있다.
반대로 자원 절약을 추구하다 보니 그 결과 친환경적인 제품이 탄생한 경우도 있다. ‘카트 캔’(Cart Can)은 목재를 가공할 때 나오는 재료를 재활용하여 만든 이른바 ‘종이 캔’으로 싼 가격과 고품질로 승부하는 PB 업계에서 널리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 절약과 건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어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자전거 붐이 일고 있다. 그중에서도 전동 자전거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전동 자전거는 먼 거리를 갈 때나 언덕길을 오를 때 수월하기 때문에 본래 여성이나 노약자가 주된 소비층이었지만 최근에는 ‘자출족’ 남성들을 겨냥한 스포티한 전동 자전거도 늘어나고 있다.
3. 기념일&이벤트 마케팅
평소에는 좀처럼 돈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특별한 날을 위해서는 선뜻 지갑을 열곤 한다. 이 점에 착안하여 무엇이건 ‘기념일’이나 ‘이벤트’로 만드는 마케팅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이미 존재하는 이벤트에 편승하는 제품도 있다. 지난해 일본의 한 로컬 맥주 회사는 ‘보졸레 누보 와인’의 출시일인 11월 20일에 맞춰 맥주를 한정 판매하는 이벤트를 벌여 큰 성공을 거뒀다. ‘발리 와인(Barley Wine)’이라는 이 맥주는 ‘보리 와인’이라는 뜻으로 한 병에 1050엔(약 1만 5000원)이라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한정 생산한 3000병이 그날 모두 팔렸다.
‘산토리’는 2009년 세계 최초로 파란 장미를 상품화할 예정이다. 이미 자사의 맥주 홍보 캠페인에 사용하여 큰 호응을 얻은 실적이 있어, 밸런타인데이와 졸업식, 입학식, 어버이날 등 이벤트가 많은 봄에 맞춰 출시된다면 선물용으로 수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네슬레’는 2008년 어머니날을 기념하여 초콜릿 웨하스 ‘킷캣’의 상자 뒷면에 주소와 편지를 써서 그대로 우편으로 보낼 수 있는 새로운 패키지를 출시하여 화제를 모았다. 이에 이번 12월에는 일본의 입시철을 맞이하여 수험생 응원용으로 다시 판매할 예정이라고 한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