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나 디존과 두 자녀인 토리안, 파트리샤. 아이들의 아버지는 노르웨이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이들을 버린 채 필리핀을 떠났다. 사진=독일 시사주간 ‘포쿠스’
푹푹 찌는 6월의 어느 무더운 밤, 앙헬레스 시티의 필드 애비뉴에 있는 ‘센타우로 클럽’을 나서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체리나 디존(46). 수척한 몸을 이끈 채 스쿠터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저녁 6시부터 새벽 3시까지 아홉 시간 동안 클럽에 앉아 있었지만 한푼도 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내일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녀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15년째 ‘센타우로 클럽’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현재 이곳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종업원이지만, 사실 그녀는 손님이 요청해올 경우 몰래 몸을 팔면서 돈을 버는 매춘부다. 하지만 40대 중반이 넘어서자 그녀를 찾는 손님들은 찾기 힘들어졌다. 클럽을 찾은 외국인 손님들은 무대 위에서 반라로 춤을 추는 훨씬 어리고 젊은 여성들에게만 시선을 고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디존이 클럽에서 일하면서 받는 기본급은 75페소(약 1600원)다. 그리고 여기에 팁으로 평균 120페소(약 2600원)를 더 벌기도 한다. 어쩌다 몸을 팔 경우 받는 화대는 3000페소(약 6만 5000원) 정도. 하지만 전부 그녀의 몫은 아니다. 이 가운데 1800페소(약 4만 원)는 독일인 클럽 사장에게, 그리고 300페소(약 6500원)는 뚜마담에게 각각 전달해야 한다.
화대로 버는 돈은 경우에 따라서 다르다. 점잖은 손님들의 경우에는 저녁식사만 함께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디존은 “손님들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돈을 충분히만 지불하면 나는 그 요구를 대부분 다 들어준다”고 말했다.
매주 월요일이 되면 클럽은 문을 닫는다. 주말 동안 지친 관광객들 대부분이 호텔방이나 수영장에서 노곤한 몸을 풀면서 쉬기 때문이다. 디존은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나이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아직도 이렇게 몸을 팔고 있는 이유는 집안의 가장이자 홀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싱글맘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첫 번째 남편이었던 필리핀 남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 외에도 현재 파트리샤(11)와 토리안(7)을 키우고 있다. 파트리샤와 토리안의 생부는 노르웨이 남자다. 때문에 두 아이의 외모는 또래의 다른 필리핀 아이들과는 사뭇 다르다. 머리카락은 밝은 갈색이며, 코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오똑하다. 또한 눈도 더 크고, 피부색도 밝은 편이다.
디존이 아이들의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센타우로 클럽에서였다. 작은 시골 마을인 팜팡가에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 평범하게 살고 있었던 그녀는 남편이 집을 나간 후 하루 아침에 직접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싱글맘인 그녀가 일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유흥가인 필드 애비뉴에 정착했던 그녀는 그곳에서 여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르웨이 남자를 만난 그녀는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만남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다른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노르웨이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 디존에게 전화와 이메일로 연락을 했으며, 그 후로 1년에 세 번씩 필리핀으로 날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2006년 첫째 딸인 파트리샤가 태어났고, 4년 후에는 아들인 토리안이 태어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디존은 자신의 소박한 꿈이 마침내 실현됐다고 굳게 믿었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느 날 집을 나갔던 남자가 돌연 연락을 끊더니 행방불명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메일에도 답장을 하지 않았고, 전화도 하지 않았으며, 문자를 보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후로 디존과 아이들은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들리는 소식에 따르면, 현재 이 노르웨이 아빠는 세부섬에서 다른 필리핀 여성과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디존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왜 우리 가족을 떠났을까?”라며 비통해 하고 있다.
이렇게 잊힌 채 살고 있는 필리핀 여성들은 비단 디존뿐만이 아니다. 성매매 원정을 온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가 얼마나 되는지는 현재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수천 명은 될 것으로 추산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굳이 통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홀로 남은 미혼모들과 아버지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은 앙헬레스 시티의 유흥가를 걷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클럽 앞에서 수다를 떠는 여성들의 대화만 엿들어도 그렇다. 가령 “사만다가 미국인 남자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며?” “조슬린이 독일인 아이를 낙태시키지 않았다며?”라는 식이다.
이처럼 필리핀의 성매매 관광 중심도시인 앙헬레스 시티에서 몸을 팔고 있는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리고 이곳을 가난의 탈출구로 여기고 필리핀 각지에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여성들은 태풍으로 피해를 입었거나, 폭동으로 폐허가 된 지역에서 온 여성들이 많으며, 대부분이 학교를 중퇴했거나 혹은 가출을 했다.
그렇다면 필리핀 정부는 왜 손을 놓고 있는 걸까. 이런 여성들을 보호하는 법은 과연 없는 걸까. 사실 이런 여성들을 보호하는 실정법은 존재하고 있다. 다만 이 법이 실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2004년 공포된 ‘공화국법 9262호’는 제도적으로는 자국의 여성들을 보호하고, 가해 남성들에게는 책임을 물도록 하는 법령이지만 이 법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안다고 해도 실제 처벌을 받는 경우도 드물다.
이와 관련, 로델린 라카프 검사는 “여성들의 실제 상황은 법적 상황보다 더 복잡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설령 여성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만일 아이들의 아빠가 필리핀 관할권 밖에 있을 경우에는 법을 집행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라카프 검사는 “이런 경우 우리들은 법률적 조언만 해줄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결과가 불확실한 지리한 소송 과정을 거치면서 중도 포기하게 된다고도 말했다.
이밖에도 실제 법을 집행하는 데 있어 걸림돌은 많다. 아버지로 지목된 남성들이 친자확인검사에 동의하거나 자발적으로 친자 관계를 인정해야 하지만, 사실 이렇게 순순히 요구에 응하는 남성들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필리핀 여성들이 상대 남성의 정확한 신원을 모른다는 점 또한 문제긴 마찬가지다. 보통은 이름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전화번호나 주소는 거의 모른다. 때문에 신고만 접수되면 외국인이라고 해도 공항에서 체포가 이뤄질 수 있지만 실제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
독일인 남성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로웨나 델라 체르나(38)도 그런 경우다. 15세 아들인 존 알렉시스를 키우고 있는 체르나가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곤 ‘브레히트’라는 성 하나뿐이다. 아들이 갓난아기였을 때 그녀는 남자를 상대로 양육권 청구 소송을 제기했었다. 그녀가 요구한 금액은 2만 4000페소(약 52만 원)였다. 하지만 브레히트란 남성은 친자확인검사에도 응하지 않았을뿐더러 결국 양육비 지급 요청도 거절했다.
현재 앙헬레스 시티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직업은 댄서, 종업원, 도어걸, 바텐더 등 다양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없는 직업이 있다. 바로 매춘부다. 물론 공식적으로만 그럴 뿐, 실제 매춘부들은 존재하고 있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의 성매매는 종교적으로나 실정법적으로나 엄연히 불법이지만 사실 이를 어긴 채 은밀하게 몸을 파는 여성들을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전무하다고 <포쿠스>는 보도했다. ‘천사의 도시’가 ‘잊힌 천사들의 도시’가 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