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게이머의 위엄’을 선보인 송병구 선수. 사진=세종대학교 홍보실 제공
[일요신문] “너흰 아직 준비가 안됐다”
‘총사령관’ 송병구 선수가 마치 아직 발전이 더딘 ‘기계’에 이 같은 대사를 날리는 듯 했습니다. 지난 10월 31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대결이 성사됐습니다. ‘인간 vs 인공지능’이라는 타이틀로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 대회가 열렸습니다. 프로게이머 출신 송병구 선수가 참가한다는 소식에 관심이 더욱 증폭됐습니다.
# 인간 vs 인공지능 대결에 쏟아진 관심
세종대에서 인간과 인공지능 간의 스타크래프트 대결 계획을 발표했을 때 많은 이들은 당연하게도 머릿속에서 알파고를 떠올렸습니다. 이미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에서는 “향후 스타크래프트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인간과 인공지능과의 스타크래프트 대결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렸습니다. 사진=세종대학교 홍보실 제공
대결이 벌어진 당일, 세종대에는 많은 시선에 쏠렸습니다. 각 언론사의 관심도 집중돼 최소 15대가 넘는 방송 카메라가 대회장에 설치됐고 해외 방송국의 로고도 눈에 띄었습니다.
송병구 선수에 도전할 인공지능을 개발한 세종대 컴퓨터공학과 김경중 교수는 대결에 앞서 대중들의 예상과 달리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송 선수와의 대결은 어려울 거라 본다. 중수 정도의 게이머에게 승리한다면 성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대결은 세 명의 인간 플레이어와 3가지 인공지능이 맞대결을 펼쳤습니다. 인간 플레이어로는 송병구 선수와 더불어 세종대 재학생 이승현(하수), 최철순(중수) 학생이 참가했습니다. 인공지능은 세종대 연구팀이 만든 MJ봇과 함께 국제전기전자기술협회(IEEE)가 주최한 CIG 스타크래프트 대회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한 호주의 ZZZK봇, 2위 노르웨이 TSCMOO가 나섰습니다. 송병구 선수는 페이스북에서 개발한 CherryPi와 1게임을 더 치렀습니다.
# 날카로운 타이밍, 공포감 느끼게 한 뮤탈
먼저 이승현 학생(레더 1100점)과 인공지능이 대결이 시작됐습니다. 현장을 찾은 이들 중 다수가 인간과 인공지능의 스타 대결을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스타를 플레이해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게임 내 싱글 플레이로 ‘컴퓨터’와 대결을 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형편없는 게임 실력이라도 컴퓨터를 이기기 어렵지는 않습니다. 컴퓨터는 안타까울 정도로 저조한 실력을 자랑합니다.
e스포츠에서는 대개 경기가 끝나면 승자를 클로즈업 합니다. 인공지능이 승리하자 마실 물조차 올려져 있지 않은 책상과 빈 의자가 화면에 잡혀 인상적인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안정적으로 병력을 모으던 MJ봇은 자신이 유리한 타이밍을 이해하고 있는 듯 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마린+메딕+탱크 조합의 한 번 진출한 병력은 이승현 학생의 본진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는 듯 했지만 이승현 학생은 변칙적인 플레이로 대응했습니다. ‘엘리전’을 벌인 끝에 이승현 선수가 경기를 가져갔습니다.
MJ봇의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충분히 승리로 경기를 끝낼 수 있었지만 멍청해 보이는 유닛 움직임으로 손에 쥔 승리를 놓쳤습니다. 김 교수는 “상대 본진을 모두 파괴하고 MJ봇이 그 이후 대응이 미흡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초보 수준의 이승현 학생이 펼친 변칙적인 플레이가 주효한 듯 했습니다.
이승현 학생은 1승만을 챙긴 채 나머지 인공지능에는 전패를 기록했습니다. ZZZK봇은 극단적인 4드론 저글링 러시를 택했고 TSCMOO도 4드론으로 스포닝풀까지 건설한 이후 운영을 선택하는 보기 드문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레더 1500점대를 오간다고 하는 최철순 학생은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인공지능을 상대로 위협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다소 무기력하게 무너졌습니다. 인공지능은 최철순 학생을 상대로도 전판과 다르지 않은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대기실에서 이전 경기들을 보지 못했던 그는 배틀넷에서는 만나보기 힘든 상대의 전략에 전패를 기록했습니다.
인공지능은 다소 어설픈 전략과 상황판단으로 실망스러움을 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장면에서는 지켜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공포감마저 느끼게한 인공지능의 뮤탈 컨트롤. 사진=아프리카TV 방송화면 캡처
# ‘프로는 다르다’ 입증한 총사령관 송병구
2명의 인간 플레이어가 쓴맛을 본 이후 송병구 선수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경기 초반 양상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진행됐습니다. MJ봇은 입구를 막았고 해외 인공지능은 또다시 초반 저글링 러시를 시도했습니다.
프로토스 총사령관 송병구 선수는 앞선 학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대응을 보여줬습니다. 높은 수준의 마이크로 컨트롤로 인공지능을 철저하게 유린했습니다. 경기는 모두 싱겁게 끝났습니다. 페이스북에서 개발했다는 CherryPi와의 대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송 선수는 경기를 마치고 긍정적인 평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앞선 경기를 보지 못한 상태라 긴장을 했다”는 그는 “MJ봇과의 경기는 잠시 사람을 상대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인간 vs 인공지능’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열린 대결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지만 아쉬운 점도 많이 남겼습니다. 알파고와 같은 충격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각국의 인공지능은 송병구 선수 앞에서 너무나도 무기력했습니다.
송 선수에게 ‘참교육’ 당한 MJ봇, ZZZK봇, TSCMOO, CherryPi는 아직 ‘인공지능’이라고 부르기엔 미흡한 면이 많았습니다. 알파고는 수많은 대국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전략을 선택해 바둑을 뒀지만 이날 선보인 인공지능은 사전에 입력된 시나리오대로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경기 후반에는 무시무시한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선보였지만 프로 수준의 경기에서 초반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김경중 교수와 송병구 선수. 사진=세종대학교 홍보실 제공
김경중 교수도 “현재 프로 수준의 플레이어를 이기는 것은 무리”라며 “알파고와 같이 학습능력을 탑재한 인공지능을 스타크래프트에 적용시키기는 쉽지 않다. 개별 유닛에 학습능력을 부여하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스타크래프트 전체를 이끌어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바둑은 상대방과 차례로 한수 한수를 둬나가고 모든 전장 상황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스타는 정찰을 해야 하는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자원 채집, 생산, 전투 등의 작업이 복합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상대방의 작은 움직임에 따라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합니다. 스타가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RTS. Real-Time Strategy) 게임으로 분류되는 이유입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