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사 요청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최근 키코 상품을 판매한 SC제일은행 담당자들의 녹취록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공개한 녹취록에는 SC제일은행 본점에서 지점 담당자에게 “키코가 선물환보다 40배 많은 이득을 남길 수 있으니 제로코스트라고 속여서 그쪽으로 유도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지난 10월 27일 대검찰청 앞에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키코 사건 재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고성준 기자 joonko1@ilyo.co.kr
선물환은 일정 시점에 특정 환율로 외국환을 매매할 수 있는 상품이다. 키코는 선물환의 변형 상품으로 미리 정한 환율의 상한선과 하한선 범위 안에서 외화를 거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한선을 달러당 1000원, 하한선을 900원, 약정환율을 950원으로 정해 계약하면 환율이 900원 아래로 떨어질 경우 1달러를 950원에 매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계약 기간 사이에 한 번이라도 환율이 1000원 이상으로 오르면 해당 시점의 환율과 약정환율 간 차액의 약 2배를 은행에 지불해야 한다.
당시 은행들은 환율 하락을 전망하면서 중소기업을 상대로 키코를 홍보했다. 그런데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환율이 폭등하면서 키코 계약을 맺은 중소기업들은 큰 손해를 봤다.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들은 “은행들이 설명의무를 위반하면서 불공정 거래를 했다”고 주장한다.
키코 상품이 불공정거래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최병욱 건국대 교수는 <키코 통화옵션의 헤지효과 분석>이라는 논문을 통해 “환율이 상승하면 무한정의 손실위험에 노출된다”며 “(지불해야 하는 돈이) 2배로 설정돼 있어 달러 보유량 또는 미래에 보유할 달러가 계약수량에 미달하면 투기 포지션으로 전환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불공정 계약 여부는 계약 당시 시점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외부환경 급변에 따라 발생한 큰 손실이 상대방에게 이익이 발생하는 구조라고 해서 그 계약이 불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피해 기업들은 검찰이 은행의 설명의무 위반 여부를 면밀히 살펴보지 않은 ‘부실 수사’를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당시 키코 사건은 박성재 금융조세조사2부 소속 검사가 주도했지만 2011년 초 한상대 검사가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령받으면서 검찰의 수사 의지가 꺾였다는 것. 실제 2011년 7월 서울중앙지검은 키코 사건으로 고발된 11개 시중은행 임직원 전원을 무혐의 처분했다. 박 검사는 그해 5월 공판부로 전보조치된 후 다음달인 6월 사직했고 한 검사는 같은해 8월 검찰총장에 취임했다.
대법원 판결 당시 중소기업중앙회는 논평을 통해 “거의 모든 증거자료는 은행이 가지고 있다”며 “분명한 자료 없이 소송에 임해야 하는 피해 중소기업들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키코 공대위와 시민단체들도 “지난 수사 과정에서 녹취록을 덮은 점과 수사 검사의 석연치 않은 발령 등 판매은행들에 대한 봐주기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녹취록에 언급된 제로코스트도 논란의 대상이다. 제로코스트는 수수료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9월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키코 사건과 관련해 “은행이 그 당시 수수료가 없다고 말했는데 금리의 0.2%가 수수료였다”고 말했다. 은행이 계약 규모의 0.2%에 해당하는 금리를 받는 내용으로 계약을 맺었는데 이 금리가 사실상 수수료라는 것이다. 지난 9월 18일 최흥식 금융감독원(금감원) 원장은 여의도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향후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재조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금감원 관계자는 “아직 (재조사와 관련해) 정해진 건 없다”고 밝혔다.
금융위원회(금융위) 외부 민간 자문단인 금융행정 혁신위원회는 11월 중순까지 ‘금융권 업무관행 개선 방안’을 금융위에 제시한다. 혁신위원회는 이 방안에 키코 사건도 다루기로 결정했다. 권고 수준에 따라 키코 사건 재조사 여부가 결정날 것으로 보인다.
금융권은 키코 사건과 관련해 녹취록의 대상자인 SC제일은행에 특히 집중한다.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금융권은 녹취록의 대상자인 SC제일은행에 특히 집중한다. 박종복 SC제일은행장은 키코 상품을 판매하던 2007년 당시 소매영업본부장을 맡아 그에게 키코 사건과 관련한 책임을 묻기는 힘들다. 하지만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요구에 따라 재수사에 들어가면 침묵하고 있을 수만 없다. 다른 시중은행들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금융권 관계자는 “새로운 증거 자료가 나왔기에 검찰이 수사를 한다면 SC제일은행을 우선적으로 볼 것”이라며 “그러나 수사를 하지 않으면 않았지 SC제일은행만 한정해 수사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융권에서는 내년 1월까지 임기인 박 행장의 연임을 점치고 있다. 은행 내부에서는 이미 박 행장의 연임이 결정됐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비록 입지가 탄탄해 보이기는 하지만 날벼락처럼 터진 키코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박 행장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