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에서 100년 된 독일제 칼로 면도했습니다. 50년 역사의 냉면집에선 평양과 함흥의 풍미를 맛보았습니다. 구로공단 노동자 체험관에서는 여공들의 땀과 눈물을 함께 느꼈습니다. 서울미래유산을 끝까지 ‘보존’해야 하는 이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남동 기사식당 전경. 박정훈 기자
하지만 일부 미래유산들이 높은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문을 닫고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일요신문i>은 ‘백 투 더 서울’ 마지막 편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미래유산들을 돌아봤습니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 기사식당 거리’는 택시기사들의 안식처로 불렸습니다. 택시기사들은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습관처럼 연남동을 찾았습니다. 동교로 연남파출소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약 400m 구간엔 순댓국집, 돼지불백집 등 저렴하고 맛좋은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택시기사들은 상추쌈에 생마늘과 풋고추를 올려 ‘돼지불백’을 먹었습니다. 탱탱한 비계가 혀끝을 감싸고 살짝 타들어간 불향이 코끝을 자극하면 피로를 잠시 잊을 수 있었습니다. 1970~80년 당시 ‘연남동 기사식당’ 거리가 밀려드는 택시기사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11월 2일, 연남동 기사식당 거리를 찾았을 때 기자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택시를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기사식당 거리가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카페, 편의점, 미용실, 술집 등이 즐비했을 뿐, 기사식당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왼편에 노란색 빛깔의 카페가 보이시나요? 택시기사들 사이에 최고의 맛집으로 유명했던 ‘조박사복해장국’가 있는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카페로 변했습니다. 카페 관계자는 “한 달 전에 들어왔습니다. 여기는 원래 유명한 복맑은국(지리)집이었습니다”고 전했습니다.
기사식당 거리에서 만난 순댓국집 주인 A 씨는 “높은 임차료 때문에 조박사복해장국을 포함해 그나마 있던 밥집들도 전부 나갔습니다. 택시기사들은 거의 없습니다. 임차료가 오르면 식대를 올릴 수밖에 없는데, 어떤 택시기사가 값비싼 기사식당을 찾을까요”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연남동 기사식당 전경
수십 년 전통의 껍데기집도 최근 편의점으로 바뀌었습니다. 30년 역사의 연남순대국집 자리에는 양대창 전문점이 자리 잡았습니다. 치솟는 임차료를 감당하지 못한 기사식당들이 연남동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의 주인 A 씨는 “임차료가 매년 오르는 추세입니다. 3년 전 월 250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350만 원이에요. 건물 주인이 갑자기 올려달라고 해도‘그냥 나가라’고 할까봐, 꼼짝없이 내야 합니다. 주변 사무실들도 임차료를 감당 못해 이곳을 떠나면서 직장인 손님들도 줄었어요”라고 밝혔습니다.
연남동 돼지구이 백반집 전경. 박정훈 기자
‘연남동 돼지구이 백반집’ 가게 주인 송장훈 씨는 “옛날에 잘 나갈 때나 손님들이 많이 왔어요. 매출은 더욱 떨어졌고 임차료만 늘었습니다. 연남동이 ‘핫플레이스’라고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술집이나 카페에 몰려요”라고 설명했습니다.
임차료가 갑자기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연남동 인근 부동산업자는 “경의선숲길 공원이 생기고 맛집이 들어오면서 연남동 상가와 주택 매매가가 엄청 올랐어요. 덩달아 임차료도 올랐습니다. 연남동이 확 떴어요. 투기꾼들이 건물을 매입한 뒤에 높은 임차료를 요구하는 것이죠”라고 밝혔습니다.
송 씨는 “경의선숲길 공원 때문에 주말만 되면 젊은이들이 떼로 몰려와요. 여기가 돈이 되니까…술집이 너도나도 들어왔습니다”고 덧붙였습니다. A 씨도 “경의선숲길 공원 때문에 이렇게 까지, 임차료가 오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경의선숲길 공원 전경
2015년 6월, 기사식당 거리 바로 옆엔 경의선숲길 공원이 들어섰습니다. 녹슨 폐철로 위에 잔디가 깔리고 개울물이 흘렀습니다. 주말마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상가임차료가 순식간에 2~3 배씩 상승한 이유입니다.
경의선숲길 공원 전경
상권이 활성화됐지만 높은 임차료를 감당하지 못한 기사식당 주인들이 연남동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서울미래유산을 집어삼킨 것입니다.
연남동 돼지구이 백반집 전경
경의선숲길 공원이 들어선 이후 기사식당들이 쓰던 주차장 공간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기사식당들은 가게 앞 공간을 한 면당 하루 3만 5000원 씩 마포구 시설관리공단에 내고 전용주차장으로 사용해왔습니다.
하지만 공원을 찾는 시민들이 늘면서 “주차 공간이 부족하다‘는 민원이 늘었습니다. 마포구는 2015년 8월부터 기사식당거리 양쪽을 평행주차 형태의 공영주차장으로 바꿨습니다.
순댓국집 주인 A 씨는 “상가 앞 공간에 택시기사들이 차를 댔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어요. 심지어 사람들이 가게 앞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공원 쪽으로 다시 가고 있습니다. 기사들이 백반을 먹고 주차료까지 내려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라고 밝혔습니다.
식당 앞에 주차된 택시 한 대가 보이시나요? 취재 결과 주차공간은 협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백반집 주인 송 씨도 “구청에서 오후 12시부터 1시까지, 기사식당이 공영주차장을 쓰게 해줬지만 그때도 외지인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이곳은 기사식당 거리가 아니에요”라고 밝혔습니다.
공씨책방 전경
또 하나의 서울 미래유산, 공씨책방의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여름 <일요신문i>가 보도한 ‘백 투 더 서울 3탄, 서울 예술가 따라잡기’를 기억하시나요? 기자는 온갖 보물이 가득한 공씨책방을 소개했습니다. 공씨책방의 역사는 무려 44년입니다.
공씨책방은 고 공진석 씨가 1972년 경희대 앞에서 처음 문을 연 국내 1세대 헌책방입니다. 지금은 신촌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조선고등법원이 발행한 고서적, 성문종합영어책 등 없는 책이 없을 정도로 오래된 헌책방입니다. 공씨책방엔 약 10만 권이 15평 남짓한 공간에 쌓여있습니다.
공씨 책방 내부 전경. 박정훈 기자
하지만 공씨책방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칼날은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백 투 더 서울 3탄, 서울 예술가 따라잡기’는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폐업 위기에 내몰린 공씨책방의 현실을 지적했습니다. 지난해 바뀐 건물주는 월 130만원이던 임차료를 300만원으로 올리고, 임차료를 감당할 수 없으면 건물에서 나가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 기자와 만난 고 공진석씨 처제 최성장 씨는 “신촌 로터리와 대학가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입니다. 인구가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임차료가 갑자기 세 배나 올랐어요. 건물주가 우리를 상대로 명도 소송을 걸어서 재판 중입니다”고 전했습니다.
최근에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서울서부지방법원은 건물 주인이 공씨책방을 상대로 낸 건물 명도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공씨책방은 법원에 항소장을 내기 했습니다. 11월 2일 약 3개월 만에 다시 만난 최 씨는 “헌책방이 돈의 논리로 휘둘리면 안 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이 건물을 사서 자기네 입맛대로 임차인들을 내쫓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월세를 감당할 수 없으면 나가는 것이 맞지만, 집주인이 높은 월세를 내라고 통보하면서 세입자를 만나주지도 않는 것은 너무합니다”이라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동대문 헌책방 거리 전경. 박정훈 기자
‘동대문헌책방 거리’도 서울미래유산입니다. 1960년대 당시 청계천 고가도로 밑은 헌책 노점들이 가득했습니다. 청계천 복개 공사 이후 주변이 개발되면서 갈 곳이 없어진 헌책방들이 동대문 평화시장 일대로 모여들었습니다.
1960~70년 당시 까까머리 중․고등학생들은 신학기가 다가오면 교과서, 참고서 등을 마련하기 위해 동대문을 찾았습니다. 헌책방 앞은 다양한 종류의 책을 팔고 사러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어르신들은 일반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고서들을 찾아 헌책방 거리를 찾아 헤맸습니다.
동대문 헌책방 거리 앞에 책이 쌓여있다. 박정훈 기자
하지만 지금은 ‘헌책방 거리’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입니다. 전성기 시절 약 100개가 넘었던 헌책방은 20곳 정도로 줄었습니다. 헌책방 사이로 수많은 옷가게들이 들어서 있는 까닭입니다.
40년 동안 헌책방을 운영한 홍 아무개 씨는 “가게를 내놓은 지 3년이 지났는데 안 나가요. 남은 20곳 중에서도 내놓은 집이 많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건물 주인이 바뀌고 월세는 자꾸 오르고…”라고 밝혔습니다.
동대문 헌책방 거리 가게 사진.
그렇다면 헌책방들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헌책방 주인 B 씨는 “1970년대 당시 동대문 헌책방거리 주변은 헌책방이 많았습니다. 전국에 있는 학생들이 참고서를 사기 위해 이쪽으로 모였습니다. 하지만 2000년 대 초부터 인터넷 발달하면서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현만후 동대문 평화시장서점연협회 회장은 “‘헌책방이 동대문에 아직도 살아있다’라는 점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마트폰 때문에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지만 마치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오셨으면 좋겠어요. 아직도 동대문에는 헌책방이 있습니다. 이점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고 전했습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