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야구인은 한 가지를 더 강조했다. “아이는 어머니 혼자 키우는 게 아니다. 어머니가 야구선수 아들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세세한 부분을 챙긴다면, 아버지는 아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다.” 야구선수의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은 경제적 지원 외에도 많다는 의미다. 실제로 성공한 야구선수의 아버지는 아들의 길잡이이자 정신적 지주를 넘어 코치와 경호원, 심리 상담사 역할까지 두루 해내곤 했다. 자칫 아들이 그릇된 유혹에 빠져 야구와 멀어질 때면, 단호하게 회초리를 들어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도 바로 아버지의 역할이다.
# 류현진과 이승엽의 아버지
대표적인 ‘야구 아빠’가 LA 다저스 류현진의 아버지 류재천 씨다. 류 씨는 초등학교 3학년생 둘째 아들이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최고의 조력자가 됐다. 아들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뒤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른손잡이인 아들이 왼손 투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아예 처음부터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사줬다. 류현진은 보기 드문 좌투우타 선수로 자라났다.
류재천 씨. 류현진의 아버지
정신적인 교육도 확실하게 시켰다. ‘야구 신동’인 아들이 자만하지 않고 겸손과 열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류현진이 동산고 2학년 때 팔꿈치 수술을 받고 재활하는 동안에도 경기가 있는 날은 무조건 야구장에 데리고 갔다. 지방에서 밤늦게 경기가 끝난 뒤 새벽에 인천으로 올라오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했다. 비록 마운드에 오르지는 못해도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동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라는 뜻에서였다. 대신 성적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잘하든 못하든 평정심을 지켰다. 위기에서 더 굳건해지는 류현진의 강심장은 그렇게 형성됐다.
KBO 리그 역대 최고 타자인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 씨도 자신만의 교육법으로 최고의 야구선수를 키워냈다. 이 씨는 당초 아들이 야구에 입문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운동해서 성공하는 사람 못 봤다”며 말렸다. 그러나 아들이 단식투쟁까지 불사하자 결국 졌다. 다행히 아들은 학창시절부터 ‘야구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프로와 대학이 치열한 영입 경쟁을 펼쳤을 정도다. 그래도 이 씨는 아들에게 ‘잘한다’는 칭찬을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아들을 잔뜩 치켜세우면서 키우는 부모를 많이 봤지만, 그들 중 성공한 선수를 보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아들이 잘하면 잘할수록 ‘자만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래야 너도 살고 팀도 산다”고 했다. 스스로도 다른 선수나 부모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모범을 보였다. 야구 실력만큼이나 최고로 인정받는 이승엽의 인품은 이런 ‘조기 교육’ 위에서 자리 잡았다.
이춘광 씨. 이승엽 아버지
# ‘야구 아빠’의 정성과 눈물 그리고 선견지명
이들 외에도 특급 선수 뒤에는 늘 든든한 아버지가 존재했다. 올 시즌을 끝으로 NC에서 은퇴한 이호준도 아버지 이을기 씨 덕분에 야구선수로 성공한 케이스다. 이호준은 1994년 고향팀 해태에 투수로 입단했지만 한동안 프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고 가출했다. 스스로 “스무 살부터 스물두 살 때까지 정말 ‘미친 듯이’ 놀았다”며 “아무도 내게 뭐라 하지 않았다. 누군가 조언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고 털어놨을 정도다.
그때 그를 다시 야구장으로 이끈 건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유일하게 이호준에게 회초리를 들 수 있는 존재였다. 그는 “아버지는 술도, 담배도 안 하는 분이셨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라며 “내가 야구장에 나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광주 시내에 경찰차를 다 깔아서라도 찾아냈을 정도로 끈질기게 나를 잡으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헤매느라 밤잠을 설쳤고, ‘정신 차리라’고 외치며 사랑의 매를 들었다.
그렇게 강했던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아들의 천부적인 재능을 아까워했다. 김응용 당시 해태 감독을 찾아가 “우리 아들이 타자로라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이호준은 큰 충격을 받았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1년만 더 열심히 해보고 안 되면 그때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 1년은 20년이 됐다. 다시 야구장으로 돌아온 이호준은 KBO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여러 기록을 남기고 은퇴하는 아들에게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고 쓰인 트로피를 자체 제작해 선물했다.
이뿐 아니다. 양준혁의 아버지 양철식 씨는 어린 시절 야구를 그만두려 했던 아들의 몸을 고쳤다. 양준혁은 중학교 시절 심장병을 앓았다. 의사가 “고치기 어렵다”고 했다. 주변에서 ‘야구를 하면 심장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그만두는 게 낫겠다’고 권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포기하지 않았다. 전국을 돌며 심장병에 좋다는 약을 수소문했다. 천신만고 끝에 귀한 한약을 구했다. 양준혁은 “그 약을 먹고 심장병이 나았다. 다시 야구를 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 후 양준혁이 어떤 선수로 성장했는지는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한화 김태균은 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야구선수가 됐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수업을 받고 있는데 아버지가 느닷없이 교장실로 들어오셨다. 담임선생님과 얘기를 나누셨고 곧바로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했다”며 “교장선생님이 내 손을 보시고는 ‘선동열처럼 되어라’며 전학을 승인하셨다”고 했다. 김태균은 그렇게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로 옮겨 얼떨결에 야구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너는 분명 야구선수로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김태균은 성공했다. 김태균이 늘 달고 있는 등번호도 아버지가 직접 골라준 번호다. 북일고에 진학할 때 아버지는 “52라는 숫자의 형태가 한 쪽으로 좋은 기운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고 했다. 그 후 ‘52’는 김태균을 상징하는 번호가 됐다.
넥센 이정후 선수와 이종범 해설위원. 일요신문 DB
# 이정후의 환희와 유민상의 다짐
평범한 가장도 아들을 위해서라면 강해진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유명한 야구 선수 출신이라면 어떨까. 아버지가 걸어간 길을 아들이 뒤따라가는 데는 장점과 단점이 확실히 있다. 분명한 것은 아들이 느끼는 부담이 다른 선수들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넥센 이정후는 그 압박감을 누구보다 잘 이겨낸 선수다. 이정후는 11월 6일 열린 2017 KBO 시상식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신인왕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바람의 아들’ 이종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이다. 이정후는 아버지도 타지 못한 신인상을 손에 넣었다. 그는 수상 후 “그 점을 뿌듯하게 생각한다”며 싱글벙글 웃었다.
사실 이정후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추억이 많지 않다. 스타였던 아버지는 늘 프로야구 선수로 경기에 출전하느라 1년의 절반은 집을 비웠다. 대신 집에서 TV로 지켜보는 아들에게 야구로 확실한 롤모델이 됐다. 살아 있는 시청각 교육이다. 집에서는 채찍질 대신 따뜻한 조언을 했다. 이정후는 “그동안 아버지께 한 번도 혼난 적이 없다. 늘 친구처럼 내 고충을 잘 들어주셨다”고 했다.
이종범 위원도 이정후가 프로에 입단한 후 오히려 아들에 대해 말을 아낀다. 자칫 자신의 말 한 마디가 아들에게 누가 될까 염려해서다. 무엇보다 소속팀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역할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야구 선배’가 아닌 ‘아버지’로서 옳은 길을 제시하는 쪽에 중점을 둔다. 이 위원은 “운동은 팀에서 스스로 하는 것이다. 다만 나는 유니폼을 입는 시간 외에 개인 생활에 대해 얘기한다”며 “요즘은 야구계에 사건 사고가 많으니 늘 더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고 했다.
때마침 이날 시상식장에는 또 다른 야구인의 아들이 참석했다. kt 유민상이다. 그는 한화 감독을 역임했던 유승안 경찰야구단 감독의 둘째 아들이다. 형은 LG 투수 유원상이다. 유 감독은 어린 시절 “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나선 두 아들을 말리지 않았다. 아들들의 실력과 노력을 믿고 맡겼다. 지금도 여느 야구 선수 아버지들처럼 사적으로는 야구 얘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 특히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이종범 위원과 마찬가지로 “소속팀에 엄연히 코치들이 있는데 내가 괜히 얘기하면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유 감독 역시 선수로서 마음가짐이나 올바른 자세를 주로 강조한다.
유민상은 조금씩 성장해 가는 중이다. 이날 퓨처스 남부리그 타율상을 받았다. 단상에 올라 처음으로 단단한 각오를 털어 놓았다. “모두 나를 유승안 감독의 아들 유민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아버지가 ‘유민상의 아버지 유승안 감독’이라 불렸으면 좋겠다. 그날까지 열심히 하겠다.” 이정후의 신인왕 수상과 별개로 또 다른 울림을 안긴 코멘트였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놀런 라이언 아버지의 특별한 교육…10년간 신문 배달시켜 ‘멘탈갑’ 만들었다 ‘베이스볼 대디’의 열정은 한국 선수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내로라하는 메이저리거들도 어린 시절 아버지의 교육 방식 덕분에 특급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놀란 라이언이 대표적이다. 그는 ‘라이언 익스프레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시속 100마일 직구를 던지는 강속구 투수의 대명사였다. 27년간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통산 325승을 쌓았다. 그가 1999년 명예의 전당에 오를 때 득표율은 98.79%에 달했다. 텍사스와 휴스턴에서는 등번호 34번, 캘리포이나 에인절스에서는 등번호 30번이 각각 영구 결번으로 지정돼 있다. 전 구단 영구 결번인 재키 로빈슨(42번)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구단에서 영구 결번의 영광을 얻은 선수다. 현재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구단주인 놀란 라이언. 연합뉴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덕분에 특별한 경험을 했다. 라이언의 아버지인 린 놀런 라이언 시니어는 휴스턴 교외에 있는 앨빈에서 지역 신문 <휴스턴포스트> 보급소를 경영했다. 그는 아들이 8세가 된 해부터 직접 신문을 배달하게 했다. 18세 때까지 무려 10년간 매일같이 계속됐다. 그것도 새벽 한 시부터 네 시까지 이어지는 고된 일상이었다. 아버지는 야구를 하는 아들이 자신이 맡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원했다. 그 끈기와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 맡긴 일이 신문 배달이었다. 라이언은 야구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10대 성장기에 매일 새벽 세 시간씩 신문을 배달하며 강철 같은 체력과 책임감을 길렀다. 투수들에게 필수인 ‘루틴’의 지루함을 이겨내는 능력도 그때 생겼다. 라이언 시니어는 신문 배달 외에도 달리기와 롱토스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소화하도록 주문했다. 1965년 라이언이 뉴욕 메츠에 입단할 때까지 아버지가 내린 미션은 계속됐다. 그리고 마침내 프로 선수가 된 아들 라이언은 새벽의 동네 골목길이 아닌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질주하기 시작했다. 라이언의 아버지부터 시작된 투지의 전통은 후손에게도 대물림됐다. 라이언의 아들은 현재 휴스턴 구단 사장인 리드 라이언이다. 그리고 리드의 아들이자 라이언의 손자인 잭슨 라이언은 왼손 투수다. 다만 할아버지와 같은 특급 메이저리거는 될 수 없다. 뇌성마비를 안고 태어나 몸의 오른쪽 전체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휴스턴의 한 고교 야구팀에서 불펜 투수로 활약하고 있다. 글러브를 오른팔에 얹은 채 왼손으로 투구를 한 뒤 곧바로 왼손에 다시 글러브를 옮겨 끼고 수비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한다. 잭슨은 태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 리드의 도움과 노력 속에 기적적으로 건강하게 자랐다. 또 “할아버지처럼 야구를 하고 싶다”는 의지만으로 끊임없이 투구 자세를 연구하고 훈련했다. 결국 마운드에서 삼진도 잡을 수 있는 투수로 거듭났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계속 야구를 할 생각이다. 일흔이 넘은 메이저리그 레전드 할아버지가 가장 대견해 하는 손자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