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6월 애플 본사에서 열렸던 ‘3G 아이폰’ 발표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스티브 잡스.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 때문에 건강이상설이 끊임없이 돌고 있다. | ||
미국의 컴퓨터 기업인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 최고경영자(53)가 모습을 감추었다. 지난 1월 초 열렸던 IT업계 최대의 신제품 전시회 겸 발표회인 ‘맥월드 엑스포’에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11년간 빠지지 않고 행사에 참석해서 기조연설을 했던 그가 어쩐 일인지 올해는 연설은커녕 행사 자체에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애플 측은 “더 이상 맥월드 같은 별도의 행사가 필요 없게 됐다. 소매점과 인터넷 사이트만으로도 홍보 효과가 충분하다고 판단, 올해를 마지막으로 2010년부터는 행사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곧이 듣지 않았다. 이보다는 다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잡스의 건강 문제가 그것이다.
지난 2004년 비밀리에 췌장암 수술을 받았던 잡스는 그 후 끊임 없이 건강 이상설에 시달려왔다. 최근에는 그가 6개월 병가를 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런 소문을 더욱 부채질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난 2008년 6월.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애플 본사에서 열렸던 ‘3G 아이폰’ 발표회장. 잡스가 제품을 소개하기 위해 연단에 올라서자 장내가 술렁였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평소와 다름 없는 검정색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푹 꺼진 양 볼과 헐렁한 청바지는 그가 얼마나 야위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의 사진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고 곧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졌다. 사진이 공개된 그날 애플사의 주가는 4.18%포인트 하락했다.
이에 곧 “췌장암이 재발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등 괴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애플 측이 구체적인 해명을 하지 않자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으며, 급기야 “잡스가 이미 죽었다”는 괴담까지 등장하고 말았다.
지난해 8월 블룸버그 통신은 잡스의 부고 기사를 잘못 내보내는 대형 사고를 쳤다. 그의 건강 이상설이 증폭되자 언론사의 관행상 미리 작성해두는 유명인사의 부고 기사를 준비하다가 그만 실수로 인터넷에 기사를 30초가량 띄운 것이다. 부랴부랴 기사를 삭제하긴 했지만 이미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죄다 퍼진 상태였다.
이를 비웃듯 잡스는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아이팟 신모델 설명회에 등장해 45분 동안 정력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여전히 마른 듯 보였지만 그는 대형 스크린의 자막을 통해 “나의 죽음에 관한 기사는 매우 과장된 것”이라며 소문을 일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은 전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0월에는 CNN의 시민기자 사이트 게시판에 “잡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급히 응급실로 후송됐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하지만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조사 결과 이 기사는 10대 누리꾼이 퍼뜨린 유언비어로 밝혀졌고, 게시글도 20분 만에 삭제되면서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밖에도 유명 과학 블로그인 ‘Gizmodo’에 또 한차례 ‘잡스의 건강이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다’는 기사가 올라왔는가 하면, 한 극성맞은 블로거는 잡스가 살고 있는 동네를 찾아가 그의 근황을 캐묻는 열정까지 보여주었다. 이 블로거는 잡스의 단골 요구르트 가게를 직접 찾아갔으며, 점원으로부터 “잡스가 며칠 전에도 가게에 다녀갔다. 매우 건강해 보였다”는 글을 올리면서 애플 마니아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소문이 끊이지 않자 잡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 맥월드 엑스포가 열리기 하루 전날인 지난 1월 5일 애플 커뮤니티에 보낸 이메일에서 그는 직접 자신의 건강 문제를 언급했다. 이 공개 서한에서 그는 “모두 알다시피 지난 한 해 동안 체중이 많이 줄었다. 그동안 의료진들이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얼마 전 원인이 밝혀졌다. ‘호르몬 불균형’ 때문에 체내에 단백질이 축적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영양상’의 문제로 매우 간단하고 단순한 치료다. 이미 치료를 시작했고, 올 봄쯤에는 다시 몸무게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잡스가 이렇게 직접 나서서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자 그를 염려하던 직원들과 투자자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메일을 보낸 지 10일도 채 되지 않아 잡스가 병가를 발표한 것이다. 14일 발송된 이메일을 통해 잡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건강 문제가 복잡한 것 같다. 건강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6개월 간 병가를 떠나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병가 중에도 계속해서 CEO직은 유지할 것이고, 회사의 전략적인 결정에도 참여할 것이다”며 직원들을 안심시켰다.
▲ 스티브 잡스의 2007년 9월경 모습(왼쪽)과 2008년 9월경 모습. 1년 만에 얼굴이 부쩍 야위었다. | ||
잡스의 이메일을 놓고 의학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잡스 본인이 더 이상의 해명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학 전문가들은 그의 몇 마디만을 놓고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가장 의심해볼 만한 것은 췌장에서 생성되는 호르몬인 인슐린이 충분히 분비되지 않을 경우 당뇨병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체중이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는 췌장에서 분비되는 소화효소에 이상이 생기면 소화액 분비가 감소되고 이로 인해 체내에 흡수되는 칼로리가 줄어들면서 살이 빠진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췌장암 수술 후 발생한 합병증 때문에 간이식 수술을 받게 됐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있으며, 췌장암이 재발해서 암세포가 다른 장기에까지 전이됐고 이로 인해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있다.
잡스의 표현이 매우 애매하고 막연하다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로버트 러스팅 신경내분비학과 교수는 “잡스의 말은 상당히 모순적이며, 또 애매하고 막연하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잡스의 말만 들으면 갑상선 항진증부터 다른 기관의 암까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결정적이면서 구체적인 내용이 빠져 있다”고 말했다.
가령 ‘호르몬 불균형’이라고 표현한 것은 내분비계의 문제인데 정확히 어떤 호르몬인지 가늠할 수 없으며, 단백질이 체내에 축적되지 못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들, 가령 췌장암에 따른 증상인 배뇨 작용 이상이거나, 혹은 다발성 골수증 등 다른 원인으로도 살이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건강문제를 놓고 설왕설래가 오가자 뿔이 난 것은 투자자들이다. 애플사가 잡스의 건강에 대해 쉬쉬한 탓에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됐다는 것이다. 사실 잡스가 애플사에 미치는 영향력은 다른 기업의 CEO들보다 막대하다. ‘잡스=애플’이자 ‘잡스가 곧 애플의 얼굴’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그의 건강에 따라 주가가 춤을 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례로 지난 5일 잡스가 이메일을 통해 ‘호르몬 불균형 때문이다. 치료 중이다’라고 밝힌 후 4.2%포인트 상승했던 애플 주식값은 그가 병가를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다시 3.5%포인트가량 하락하기도 했다.
애플사의 주가가 잡스의 건강에 따라 요동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였다. 2008년 5월까지만 해도 190달러(약 26만 원)대였던 애플사의 주가는 지난 6월 수척해진 잡스의 사진이 공개되자 170달러(약 23만 원)대로 떨어졌으며, 7월 <뉴욕포스트>가 잡스의 건강 이상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다시 160달러(약 22만 원)대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그 후 “잡스의 건강 이상설은 과장된 것”이라는 <뉴욕타임스>의 보도가 나간 후에는 다시 2.6%포인트 상승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9월 금융위기로 80달러(약 11만 원)대까지 떨어졌고, 그 후 오르락내리락했던 주가는 현재 계속해서 80달러 대에 머물고 있다.
잡스의 건강에 따라 주가가 출렁이자 요즘 미국에서는 ‘과연 기업은 CEO의 건강 문제를 공시할 의무가 있는가’를 놓고 설전이 오가고 있다. ‘굳이 알릴 의무는 없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만일 공식적으로 발표했을 때 거짓말을 했을 경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에 얼마 전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애플이 잡스의 건강문제를 일부러 은폐했는지 혹은 허위사실을 통해 투자자들이 손해를 보았는지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잡스의 건강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과거 그가 겪었던 인생 역정과 고난, 그리고 열정과 창의적인 경영철학을 잘 아는 사람들 역시 그가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모두들 여름에 다시 만나길 바란다”는 그의 마지막 말처럼 말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