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치의 달인 고무로는 체포 직전까지 월세 3000만 원이 넘는 호화 아파트에 살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했다. | ||
지난 1월 21일 고무로 데쓰야가 첫 번째 공판에 참가하기 위해 오사카 지방법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법원 앞에는 이미 100명이 넘는 기자들이 고무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하늘에는 방송국의 헬기까지 돌아다녔다. 고무로의 몰락에 관한 언론의 관심은 컸다. 특히 공판에서 과거의 화려한 생활부터 눈덩이처럼 빚이 불어나고 사기에 손을 대게 된 과정이 상세히 밝혀지면서 체면과 과시욕, 사랑 때문에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 고무로 데쓰야의 인생이 드러나게 됐다.
고무로 데쓰야는 1970년대 중반 음악계에 데뷔했고 80년대부터 유명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점차 인기를 얻게 됐다. 90년대는 그야말로 고무로 데쓰야의 전성기였다. 자신도 멤버였던 글로브, TRF, 가하라 도모미, 아무로 나미에 등 당대 최고 인기 가수들을 키우며 수많은 밀리언셀러를 만들어냈다.
이런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연간 수십억 엔을 벌어들이게 됐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는 억대 납세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부와 명예, 인기까지 모든 것을 거머쥔 그의 씀씀이는 일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벤츠와 페라리 등 여러 대의 값비싼 외제차가 있음에도 세계에 25대밖에 없다는 한정판 벤츠를 사기 위해 3억 엔(약 47억 원)을 과감히 지불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6억 3000만 엔(약 98억 원)짜리 저택, 하와이에 1억 2000만 엔(약 19억 원)짜리 저택, 발리에 총액 2억 엔(약 31억 원)이 넘는 주택과 땅을 구입했다. 또한 2000만 엔(약 3억 1000만 원)을 들여 비행기의 퍼스트클래스를 통째로 빌리기도 했다. 글로브와 TRF 등의 멤버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1000만 엔(약 1억 6000만 원)씩 나눠준 적도 있었다.
▲ 고무로는 아내 게이코에게 명품 옷과 고급차 등을 원하는 대로 사주고 용돈으로도 수천만 원씩 주기도 했다. | ||
그러나 이런 호화로운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새로운 가수들이 나타나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고무로 표’ 음악이 광고나 드라마에 사용되는 일도 점점 적어졌다. 재기를 위해 미디어의 황제 루퍼트 머독과 손잡고 홍콩에 진출했지만 결국 손해만 보고 끝나게 됐다. 그러면서 점점 수입도 줄어들게 됐다.
2001년에는 자신이 키운 가수 아사미와 결혼해 딸을 낳았으나 10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다. 이혼 과정에서 아사미는 고무로에게 10억 엔(약 156억 원)이 넘는 위자료와 양육비를 요구했다. 당시 현재의 아내이자 함께 활동하던 글로브의 보컬 게이코(36)와 사랑에 빠져있던 그는 두말 않고 합의를 해줬다.
이렇게 시작된 게이코와의 결혼생활은 시작부터 빚더미에 오른 상태였다. 그럼에도 지출은 오히려 커져갔다.
고무로는 아내를 위해 명품 옷과 가방, 고급차 등을 원하는 대로 사주었고 가끔은 용돈으로 100만~200만 엔(약 1600만~3100만 원)을 주기도 했다.
가뜩이나 생활비와 대출이자로 큰돈이 나가던 고무로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의 양육비로도 매달 200만~400만 엔(약 3100만~6200만 원)을 지출해야 했다. 인세 수입으로는 매달 나가는 이자를 갚기에도 빠듯했기 때문에 순식간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2004년부터는 양육비를 지불하지 못하게 됐고 전처가 그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언론에 폭로하면서 더 이상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기도 힘들어졌다.
결국 2006년 여름 소속사에서 갖고 있던 자신의 음악 806곡의 저작권을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속여 10억 엔에 팔겠다고 내놔 개인 투자가로부터 5억 엔을 받아냈다. 지난해 끝내 사기 혐의로 체포되면서 화려한 시절은 막을 내렸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거물 작곡가가 빚더미에 오른 초라한 사기꾼으로 전락한 이유는 한계를 모르는 허영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을까.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