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제이어 워싱턴은 1990년대 초부터 배우 활동을 시작했고 스파이크 리 영화의 단골 배우였으며 TV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경력을 쌓았다. 그가 스타덤에 오른 결정적 계기는 <그레이 아나토미>였다. ‘시즌 1’부터 출연한 그가 원래 원했던 캐릭터는 데릭 셰퍼드. 주인공인 메레디스 그레이와 러브 라인을 형성하는 신경외과 전문의였는데, 안타깝게도 패트릭 뎀시에게 양보해야 했다. 대신 그가 맡은 역할은 프레스턴 버크. 원래는 겁 많고 통통한 스타일의 중년남 캐릭터였지만 워싱턴이 맡으면서 이미지가 바뀌었다. 한국계 배우인 샌드라 오가 맡은 크리스티나 양과 로맨스 관계를 맺기도 했다.
구체적 내용은 이렇다. 워싱턴이 나이트에게 게이라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사실 T.R. 나이트는 이전부터 게이라는 설이 나돌았지만 커밍아웃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 일 이후 그는 자신이 게이임을 공표했고, 대중은 워싱턴이 나이트를 아웃팅시켰다고 비난했다. 즉 커밍아웃을 할 의도가 없었던 나이트가 워싱턴에 의해 강제로 커밍아웃을 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면서 온라인에서 인권 단체의 ‘워싱턴 퇴출 서명’이 시작되었다. 이에 워싱턴은 최근 촬영장에서 일어난 부적절한 단어의 사용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07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레드 카펫 인터뷰에서 워싱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게이를 좋아합니다. 나도 게이가 되고 싶었어요. 제발 날 게이로 만들어 주세요.” 여기까진 조크로 넘길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시상식이 끝난 후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위험한 이야기를 한다. 촬영장에서 어떤 갈등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워싱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T.R. 나이트를 호모(faggot)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이 시기 나이트는 토크 쇼인 <엘렌 쇼>에 출연해 “현장에서 모든 사람이 그가 호모라는 단어를 쓰는 걸 들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2007년 6월, 결국 ABC 방송사는 아이제이어 워싱턴과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그레이 아나토미>가 성공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개국공신 워싱턴은 세 시즌 만에 하차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T.R. 나이트에게 ‘호모’라는 비하적 발언을 한 걸까? 진실은 이렇다. 현장에서 워싱턴과 충돌한 사람은 나이트가 아니라 패트릭 뎀시였다. 그는 현장에 상습적으로 늦게 도착했고, 그로 인해 촬영 일정에 지장을 주는 일이 잦았다. 이에 고참급 연기자인 워싱턴이 총대를 메고 뎀시와 한판 붙었고, 이 과정에서 욕설이 오갔는데 그중 호모(faggot)라는 단어도 있었다. 이 용어는 남자들끼리 말싸움이 붙을 때 상대방을 모욕하기 위해 종종 쓰는 단어다.
결정적인 건, 워싱턴과 뎀시가 충돌할 때 나이트는 현장에 없었다는 것. 그런데 연예부 기자들은 ‘호모’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었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게이설이 나돌고 있던 나이트를 견디지 못했던 ‘마초’ 워싱턴이 성적 모욕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카더라’ 통신이 나돌자 압박을 받기 시작한 나이트는 결국 커밍아웃을 하게 되었고, 이에 옐로 저널리즘은 워싱턴을 더욱 확신범 취급했다. 나름 오해를 풀기 위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워싱턴이 했던 행동들은 더욱 사태를 악화시켰으며, 결국 그는 하차해야 했다.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더 이상 워싱턴을 볼 수 없게 되자, 인과응보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자는 중립파와 그의 구명 운동을 시작한 지지파가 등장했다. 결국 당시의 일은 저널의 농간에 의한 해프닝이라는 게 밝혀졌지만, 이후 3년 가까이 워싱턴은 이렇다 할 배역을 맡지 못하고 휴업 상태에 들어가야 했다. 인기 절정을 달리던 배우에게 닥친 거대한 시련이었고, 이후 그는 계속 그 여파 속에 있게 되었다. 2014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하는 말들이 내 배우 경력을 파괴할 거라고 걱정하진 않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일들을 나에게 덧씌우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2007년 6월 7일, 내가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하차하게 된 그날에 ‘배우 워싱턴’을 죽였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