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에서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납치돼 생명을 잃을 뻔했던 불사조 김대중은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에 패배한 뒤 절치부심 끝에 김종필과 손을 잡는 이른바 ‘DJP연합’을 통해 대통령이 된다. 마지막 순간에 헤어지긴 했지만 노무현도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보수 정당 소속이자 재벌가 출신 정몽준과 손을 잡는 시도를 했고 결국 대통령이 됐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현대 정치사에서 나타난 ‘연대’의 역사다. 특히 우리 정치사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조합’을 수차례 탄생시켰다. 이런 연장선에서 진보 정당을 이끌고 있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보수정당 지휘자 유승민 대표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정책은 물론 선거까지 연대가 가능하다는 이른바 ‘연대 종합 세트’를 흘리며 연대의 군불을 때는 모습이다. 이러한 행보는 새로운 정계개편으로 흐를 수 있고 나아가 지방선거 판도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유승민 바른정당 신임 대표가 14일 오후 국회 국민의당을 예방, 안철수 대표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박은숙 기자
#안철수 유승민 웨딩마치 임박
이러다 결혼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말이 많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커플이지만 두 당 대표의 서로를 향한 구애가 너무 뜨겁다. 우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연대와 관련해 전에 없이 공격적이다. 누군가 길을 만들어줘야 따라가고, 누군가 길을 내달라고 하면 선뜻 내줬던 안 대표가 이제는 길을 스스로 만들고, 함께 걸어갈 길동무도 직접 수배해오려는 노력을 펴고 있는 셈이다. “철수가 달라졌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안 대표는 11월 15일 바른정당과의 정책연대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정기국회에서의 예산·입법 공조 방침을 밝힌 것이다. 안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바른정당과의 선거연대 추진 방안을 묻는 질문에 “지금 예산과 법안이 현안이다. 정책연대부터 제대로 충실하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잡아나가는 문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안 대표는 “(바른정당과) 서로 협력하자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지향점이 중도개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고 언급, 연대와 협력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안 대표는 이에 앞서 14일 오후 국회 당 대표실로 취임 인사차 찾아온 유 대표에게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기득권 정치를 깨고 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당”이라며 ‘공통점’을 또 부각시켰다. 둘의 개인적 유사성도 이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안 대표는 “유 대표는 경제학자로, 저는 벤처기업가로 시작했다. 함께 새로운 개혁의 파트너로서 할 수 있는 여러 일에 대해 깊은 논의와 협력을 시작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좀처럼 맞장구를 쳐주지 않아 ‘까칠한 정치인’으로 유명한 유 대표도 이날은 속사포처럼 답가를 쏟아냈다. 유 대표는 연대에 적극적인 언사를 내놓은 안 대표를 향해 “앞으로 양당 사이의 진지한 협력 가능성을 얘기해보기 위해 방문하게 됐다”고 말했다. 안 대표와 유 대표는 특히 비공개로 5분여 동안 대화를 나눴는데 이 대화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정책연대에다 선거연대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정치권의 분석이다. 비공개 대화는 배석자 없어 이뤄졌다.
둘은 독대 이후 기자들과 만나 “당 내부에서 지방선거를 치르려면 선거연대까지 논의해 볼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당장은 예산과 여러 개혁입법이 현안이지만 공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선거연대 논의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말해 선거 연대 논의가 있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유 대표 역시 기자들에게 “선거연대 가능성을 당연히 열어놓고 생각해보겠다. 다만 구체적인 방법이나 국민의당이 얼마나 의지를 가졌는지는 직접 확인이 안 됐다. 대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천생연분 아니지만 명분 뚜렷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바른정당은 대표인 유승민 의원이 걸어온 길처럼 구성원 대다수가 정통 보수 정치인들이다. 반면 국민의당은 호남 출신 의원이 절대다수로, 진보 성향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특히 국가안보적 측면에서 국민의당은 바른정당과 정반대의 신념을 갖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썼던 햇볕정책을 놓고서도 양 당은 상반된 시각을 보여 왔다.
하지만 두 정당은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고 딱 들어맞는 사주를 만들어야 할 운명에 처했다. “자유한국당의 붕괴는 초읽기”라며 호기롭게 깃발을 올렸던 바른정당은 한때 33명에 이르렀던 의원들 대다수가 빠져나가면서 이제 11명의 현역의원만 남았다. 최근 김무성 의원 등 9명의 의원이 큰집인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면서 교섭단체 지위도 잃어버렸다. 당 운영을 해야 하는 지도부 입장에서 재정적으로 엄청난 어려움에 처했고 원내 정당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추가 탈당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걱정도 구성원들의 입에서 나온다.
바른정당의 한 지역 위원장은 “국민의당과 하든, 더불어민주당과 하든, 지금보다 세를 불리지 않고는 임박한 지방선거에서 당선은커녕 후보를 낼 수도 없다. 선거에서 지역 유권자들로부터 지지와 동의를 받는 당선자를 내야 정당이 살아남는다. 우리 생각만 모두 옳다고 우겨서는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라며 할 수 있는 부분에서의 최대한 연대를 통해 생존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당도 본격적 이탈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지지 기반이 민주당과 상당 부분 겹치는 상황에서 내년 지방선거에서의 선전을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다. 이 때문에 국민의당을 향해 “언제든지 민주당행이 대거 이뤄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연대든, 통합이든, 국민의당도 어떤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는 당내 목소리가 크게 나오는 근본적 원인이 이것이다.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호남에서의 지지율도 하락세가 뚜렷하다는 점도 이러한 위기감을 뒷받침한다.
#지뢰 산적, 두 대표 리더십에 달려
연대와 통합을 위한 두 당의 움직임에 명분이 생겼고 동력도 만들어지고 있지만 당내 반발도 만만치 않다. 안철수 대표와 유승민 대표가 두 당의 ‘보스’라고 불릴 만큼 당내 지지세력이 탄탄하지 않아 당내 반발은 연대·통합의 불씨를 상당 부분 짓밟고 있다. 국민의당의 대주주 박지원 전 대표는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바른정당이 저렇게 소멸하면, 실체가 없는 것과 무슨 통합이나 연합, 연대가 있겠나”라고 말하며 바른정당과의 연대 추진 의지를 꺾지 않고 있는 안 대표를 비판했다.
이러한 기류는 호남 의원들 사이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호남에 본사를 둔 한 언론사 정치부장은 “호남 의원들은 안 대표가 바른정당과의 연대·통합을 고집하면, 결국 갈라설 수밖에 없다고 본다. 지역구 의원 대다수가 호남이라, 이들이 탈당하면 최소 20명은 된다. 이들이 교섭단체를 구성해 민주당과 당대당 통합을 한다는 여러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고 했다. 결국 국민의당이 깨지는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유승민 대표도 바른정당 내 반발 기류가 없지 않음을 시사했다. 바른정당 역시 “왜 하필 국민의당이냐”라는 의견이 있다는 것이다. 유 대표는 15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서 “선거연대나 당의 통합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하면서 통일된 의견이 당내에서 형성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이어 그는 “바른정당이 창당 이후 얼마나 많은 진통을 겪었는가. 남은 동지들은 정치적인 문제, 진로와 관련된 문제를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우리의 지향점을 공유하면서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합과 연대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고충을 밝힌 것과 동시에 당 대표가 나서서 불도저식으로 연대와 통합을 밀어붙이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동시에 시사한 것으로 읽힌다.
한 전직 국회의원은 “김영삼·김대중이 연대라는 돌파를 이뤄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당 구성원들에 대한 설득 능력이었다. 즉 큰 정치를 할 수 있는 대표의 능력이 통합·연대의 성사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며 “두 대표가 이를 성공시키고 새로운 정치세력을 탄생시킬 수 있다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이 확실시된다. 반면 실패한다면 대표 스스로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