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측은 연일 “MB는 적폐 원조”(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망나니 칼춤 연상”(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등의 날선 발언을 주고받으며 사생결단식 대결에 나섰다. 20여 년 전 시작된 ‘수화상극’(물과 불이 서로 용납하지 못한다는 뜻)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11월 15일 오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바레인 방문을 마치고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기획된 시나리오’ 의혹에 대해 정치권 한 관계자는 “양측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MB정부 시절 군 사이버사령부 여론조작 활동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의 구속, ‘MB와 김관진’의 연결고리인 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 소환 방침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자 보수진영 내부에선 백원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주도하에 이뤄진 ‘기획된 시나리오’라며 격앙된 반응이 나왔다. 이른바 ‘백원우 배후설’이다. 이에 대해 여권 한 관계자는 “청와대 비서관이 전직 대통령 의혹 수사를 컨트롤할 만한 급이냐”고 일축했다.
백 비서관은 2009년 5월 29일 경복궁에서 엄수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헌화하려던 MB를 향해 “어디서 분향을 해”라고 고성을 지른 장본인이다. 야권은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명의로 정부부처에 발송한 ‘국정과제추진부처별 TF(태스크포스) 구성현황 및 운영계획 제출’ 공문의 기안자로 백 비서관을 지목했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정치 보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가 이들이 악연 관계로 전락한 결정적 계기였던 셈이다.
노 전 대통령과 MB의 첫 악연은 2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대한민국 정치 1번지’ 서울 종로를 놓고 사투를 벌였다. 구도는 노 전 대통령(통합민주당)과 MB(신한국당), 이종찬(새정치국민회의) 간 3파전이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여당 후보이자, YS(김영삼 전 대통령) 영향력 아래에 있던 MB와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창당한 당의 후보로 나선 이종찬보다 열세였다.
인물 구도도 마찬가지였다. 현대건설 사장 출신인 MB는 당시 YS계의 개혁 공천과 함께 바람을 탔다. 레임덕(권력누수 현상) 징조가 보였던 YS는 차남 김현철 씨 주도로 홍준표 한국당 대표를 비롯해 김무성 의원, 민중당 출신인 이재오 늘푸른한국당 공동대표와 김문수 전 경기지사, 정의화 전 국회의장, 황우여 전 교육부 장관 등을 영입해 139석으로 선방했다. 이종찬은 제11대와 12대(이상 종로·중구)부터 13∼16대(이상 종로)까지 당선된 대권주자였다. 노 전 대통령은 이종찬과의 야권 단일화에 나섰지만, 합의에 실패하면서 3위에 그쳤다. 첫 번째 승부에서 MB가 승리한 셈이다.
MB 천하는 오래가지 않았다. MB는 선거비용 누락 의혹을 폭로한 김유찬 전 비서관의 해외 도피에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 벌금 400만 원을 선고받았다. MB는 결국 형 확정 전 의원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노 전 대통령은 MB 공백을 꿰차며 원내에 진입했다. 1998년 종로 재보선에서 정인봉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노무현 시대’의 막을 올린 것이다.
MB의 기사회생은 국민의정부에서 이뤄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2000년 8·15 광복절 대사면을 단행하면서 MB의 피선거권이 회복된 것이다. MB는 2002년 대선 직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대권의 급행열차’인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청계천 복원사업과 버스노선 개편을 단행한 것도 이 재임 시기다. 같은 해 대선에서는 노란풍선 열풍을 일으킨 노 전 대통령이 민주정부 2기 시대를 열었다. 종로에서 맞붙었던 경쟁자가 대통령과 서울시장으로 만난 셈이다. 이들은 이때부터 굵직굵직한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대표적인 게 행정수도 이전이다. 이는 노 전 대통령 핵심 공약이었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충청권으로의 수도 이전과 관련, “행정수도로 재미 좀 봤다”고 했다. MB는 행정수도 이전 반대 최전선에 섰다. MB는 당시 노무현 정부를 “잠시 왔다가는 5년 임기의 정권”이라고 폄훼한 뒤 “수도 이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국민투표를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10월 ‘신행정 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법’의 위헌확인 심판 소송에서 ‘관습 헌법’ 논리를 들면서 국민투표 없는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으로 판결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을 비롯해 경제 문제를 놓고도 대립했다. 참여정부 시절 ‘버블세븐’(서울 강남·서초·송파·목동, 경기 분당·용인·평촌)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하자 MB는 참여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서민경제가 죽어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강북 뉴타운을 내걸고 표심 잡기에 들어갔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최근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는 MB 때문”이라고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보수진영의 ‘세금 폭탄론’에 휘청거린 노 전 대통령은 진보진영으로부터 부동산 원가공개 등의 요구를 받았지만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일축, 양측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임기 막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논란까지 덮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민주진보 10년 권력을 MB에게 내줬다. MB는 2007년 대선에서 48.7%의 득표율을 기록, 26.1%에 그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크게 앞섰다.
노 전 대통령과 MB의 관계가 앙숙관계로 치달은 것도 이때부터다. 2008년 퇴임 후 KTX를 타고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 전 대통령은 한때 친환경 벼농사 농법 전도사를 자처했지만,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직격탄을 맞았다. 노 전 대통령의 후원을 맡았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은 세종증권 매각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 일가 등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애초 검찰은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 건넨 15억 원에 대해선 무혐의 종결 처리했으나, 권양숙 여사의 100만 달러와 3억 원 수수,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노 전 대통령의 조카 연철호에게 건넨 3억 원과 500만 달러에 관해선 노 전 대통령을 검찰 포토라인에 세우며 강하게 압박했다. 노 전 대통령 측은 박 회장과 권 여사 사이에 오간 돈을 대통령이 인지하지 못 했다고 주장했지만, 검찰은 64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의 공범으로 결론지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그(MB)는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남은 공공기관, 공기업 기관장들을 몰아냈다. 마침내 나를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도 자서전 <운명>에서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며 “노 전 대통령은 나와 친분 있는 많이 기업이,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식당도 세무조사를 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선 MB가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우리들병원’, ‘토속촌’, ‘제피로스’ 등에 대해 전방위적인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의혹이 나오지 않자 ‘태광실업’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말이 파다했다. 여권 내부에서 ‘박연차 게이트’를 놓고 표적 세무조사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 과정의 연결고리에는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있다. 한 전 청장은 참여정부의 마지막 국세청장이다. 정권교체 이후 유임된 유일한 국세청장 인선안을 놓고 뒷말이 무성했다. 여권 내부에선 2007년 대선 당시 BBK 주가 조작과 도곡동 땅 의혹을 파헤친 한 전 청장을 교체할 경우 후폭풍이 만만치 않은 만큼, MB가 전략적 공조 관계를 형성했다는 게 정설이다. 한 전 총장이 친노계를 타깃 삼아 전방위 세무조사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당시 한 전 총장은 관련 사항을 MB에게 직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서거했다. 향년 62세. MB의 친노 궤멸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도 계속됐다. 국가정보원의 ‘논두렁 시계’나 ‘문성근 합성사진’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개입 등으로 친노에 타격을 가했다. 이제 공수는 바뀌었다. 검찰의 칼끝이 MB 턱 밑까지 왔다. 친노와 MB의 악연정치는 끝나지 않았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