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 카지노 강원랜드를 제외한 국내 모든 도박장은 불법이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일요신문DB
지난 2월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당시 부장검사 김후균)는 서울 서초, 강남 일대에서 보드카페 간판을 내건 ‘텍사스 홀덤(Texas Hold’em)’ 도박장 30여 곳을 운영한 조직폭력배 등 83명을 적발했다. 적발된 도박장의 도박금 총액은 541억 원에 달했다. 검찰은 지난해 4월부터 압구정 등 서울 중심지역에서 보드카페를 가장한 사설 도박장이 성행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기획수사에 착수해 이 같은 성과를 냈다. 이 과정에서 폭력조직원들이 도박장 운영 수익금을 주요 자금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도박장에선 ‘텍사스 홀덤’이라는 게임이 주로 이뤄졌다. 텍사스 홀덤은 개인 카드 2장과 바닥에 깔린 5장 등 총 7장을 조합해 승자를 가리는 게임이다. 진행이 빠르고 10명 정도가 한꺼번에 참가할 수 있어 미국 등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은 신종 도박이다. 특히 게임이 진행되면서 예상치 못한 역전 승부가 나오는 등 사행성이 높아 카지노에서도 많이 운영되는 게임이다.
검찰에 따르면 도박개장자들은 도박주최자(속칭 관계자), 딜러, 뱅커, 서빙 등으로 역할을 체계적으로 분담하고 도박주최자는 인터넷 카페, 소셜 미디어 등에 광고글을 게시하거나 도박참가자들에 문자 메시지나 전화를 하는 방식으로 회원들을 모집해 텍사스 홀덤 도박을 하게 했다. 도박개장자들은 1시간에 1테이블마다 60만∼80만 원 정도로 고수익을 올릴 수 있어 단속 위험을 알면서도 보드게임 카페를 사설도박장으로 변칙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입금이 이뤄지는 차명계좌를 수시로 교체해 경찰 단속 등을 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드카페’ 간판을 달아 일반인들이 부담 없이 출입할 수 있어 회사원, 사업가, 의사, 연예계 종사자는 물론 나이 어린 대학생, 유학생 등이 도박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압구정 일대 일부 보드카페는 베팅금액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적은 금액으로도 도박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미성년인 고등학생들까지 도박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도박장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강남 일대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는 지난 1년 동안 계속 들었다”며 “그때 잠시 조심하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다시 예전과 같은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단속에 안 걸리기 위해 더 치밀하게 운영방식을 바꾼 곳은 있다”고 덧붙였다.
사설 도박장은 인터넷 카페와 네이버 밴드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꾸준히 홍보되고 있다. 올해 초 검찰이 검거한 일당과 여전히 같은 수법을 쓰고 있는 것. 회원이 2만여 명이나 되는 한 관련 카페에선 오프라인 도박장(일명 오프) 정보와 후기, 팁들을 공유하는 글들이 활발히 업데이트 되고 있다. 또 네이버 밴드에는 ‘홀덤’이라고 검색만 해도 수백개의 관련 글들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홀덤’ 오프라인 정보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도 있다.
홍보 내용은 대부분 동일했다. 게임은 매일 저녁 8시~10시 사이 시작되며 오전 7시~9시 사이 종료된다. 24시간 운영한다고 홍보하는 곳도 있었다. 도박장마다 다르지만 신규 회원이나 개장 시간에 맞춰 오는 ‘얼리버드’ 회원들에게는 포인트를 지급하는 등 혜택을 준다고도 나와 있다. 예를 들어 ‘신규 회원에 5만 포인트 지급’이란 첫 방문 시 5만 원가량의 게임비를 지원해준다는 말로 게임 후 정산할 때 ‘+/- 5만 원’이 적용된다는 뜻이다.
광고글에 나와 있는 휴대전화로 연락을 취하면 도박장에서 ‘손님맞이’에 나선다. 판돈 규모와 장소와 시간 등 기본적인 정보를 설명하고 마지막엔 전화로 장소를 통보하는 방식이다. 문자 메시지나 메신저는 기록이 남아 유선 전화로 장소만 말하고 끊는다. 일부 도박장은 손님을 직접 데리고 업장으로 오는 ‘픽업 서비스’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이처럼 게임에 참가하고 싶으면 언제든 인터넷에 나와 있는 연락처로 전화해 몇 가지 질문만 해도 금세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특히 현재 강남 지역 도박장들은 압구정 일대를 중심으로 검찰 수사가 대대적으로 이뤄진 바 있어 더욱 조심스럽게 운영하고 있는 분위기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강남 일대 한 도박장 관계자는 “압구정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받다가 잠입한 경찰에 걸린 것”이라며 “그래서 더 조심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어 “명함, 업무 관련 내용 확인 등 전문적인 도박꾼들이나 경찰을 가려내기 위한 절차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과거 몇 번 대대적으로 걸린 적이 있어 대부분 신원파악 절차부터 까다롭게 하는 분위기”라며 “잠입 수사를 벌이는 경찰이나 취재기자의 출입을 애초에 막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검찰과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강남 일대 도박장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직장인, 유학생, 자영업자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유흥업소가 밀집한 곳 인근 도박장엔 업소에 출입하는 직업여성과 소위 업소 호객꾼으로 알려진 직업 남성들이 자주 찾는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의 관계자는 “강남 일대는 유흥업소 직원들도 대기시간이라든가, 출퇴근 전후로 자주 하러 온다”며 “금요일이나 토요일 같은 경우는 사람이 많아 한 번 문을 열면 다음날 저녁은 돼야 끝난다”고 말했다.
온라인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불법 홀덤 도박장 홍보 게시물.
현재 사설 도박장은 강남 일대는 물론이고 홍대, 신촌 등 대학가 부근에서도 성행 중이다. 더욱이 지난해 검찰이 벌인 대대적인 수사로 강남 일대에서 주춤하던 도박장이 경기도 성남 일대로 확산된 모양새다. 최근 1년 사이 성남 분당 지역에 4~5개의 도박장이 일제히 문을 열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분당 지역 도박장 광고글에 나온 연락처로 연락을 취해봤다. 도박주최자로 추정되는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사복 경찰들이 나타나는 등 단속이 심해져 한동안 영업을 안하고 있는 상태”라며 “다시 오픈하면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또 각종 소셜미디어에 나온 정보를 보면 성남은 물론 경기도 수원, 고양의 일산 일대도 도박장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사행성 도박장은 여전히 단속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실정이다. 특히 도박장들은 대부분 점조직 형태로 운영돼 단속이 심해지면 문을 닫고 다른 지역에 다시 여는 방식으로 단속을 피하고 있다. 한 보드카페 관계자는 “도박장에서 고용돼 일하던 사람도 (운영방식을 아니까)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가서 문을 열 수 있는 게 이쪽 상황”이라며 “게임 참가만 했던 회원들 3~4명이 모여 공동투자 방식으로 도박장을 열고 직접 운영까지 하는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검·경도 이 같은 도박장 운영 방식 때문에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지난 2월 대대적인 수사를 벌인 서울중앙지검도 점조직 형태의 운영방식 때문에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검찰 관계자는 “단기간 운영하다 접고 다시 여는 메뚜기식 활동을 하는 데다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보드카페의 홀덤 테이블을 빌리는 방식이라 단속·수사에 어려움이 있다”고 전했다. 서울 지역 일선 경찰서 관계자도 “현장을 덮쳐도 증거가 나와야 검거할 수 있는데 사실상 단속 자체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도박장들도 단속 현장에서 현금이 나오는 등 직접적인 증거만 없으면 입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2월 적발한 도박사범 83명 가운데 기소중지자에 한해 수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인사이동 후 담당 검사가 바뀌긴 했지만 아직 검거되지 않은 사범들이 남아 있어 기소중지자에 한해 관련 수사를 계속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