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이전 대통령들의 비자금 관리가 얼마나 불법적이었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 자금을 집행한 안기부 기조실장은 법정에서 “여당이 총선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면 정국이 혼란스러울 것으로 예상돼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독단적으로 했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국정원 돈으로 선거용 여론조사를 했다는 박근혜 청와대의 생각과 오십보백보다.
군사정부시절 대통령 통치자금은 안기부를 포함한 여러 부처의 예산에 숨겨진 채 청와대가 필요에 따라 쌈짓돈처럼 빼내 썼다. 그 돈이 수천억 원에 이르렀고, 거기에 재벌들로부터 받은 수천억 원의 돈이 보태져 그 규모가 조 단위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정보부, 안기부는 대통령 비자금 예산을 미리 배정받아 은행에 예치해 두고 이자까지 챙겼다. 국고에 귀속돼야 할 이자는 개인이 착복했다. 쓰다 남은 예산 불용액이 국고에 반납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예산으로 배정된 비자금과 재벌들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을 뒤섞어 출처를 흐려놓는 물타기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법이 횡행했던 것은 이 돈이 예산회계특례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 법은 ‘국가 안전보장 업무의 효율적인 수행을 기하게 함’이 목적이고 ‘이에 소요되는 예비비의 사용과 결산은 총액으로 한다’가 전부다.
지출 내역을 밝히지 않고, 얼마를 썼다고만 밝히면 되는 ‘깜깜이 예산’이다. 정보기관이 정보수집활동을 위해 쓴 예산을 기밀로 보호하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인정된다. 하지만 불법적인 정치공작 비용까지 안보업무로 간주해 예산회계특례법으로 은폐하는 것은 범죄다.
이번 사건의 상납금 규모는 월 5000만 원 또는 1억 원, 연간 40억 원 수준이라고 보도되고 있다. 과거 대통령의 비자금 규모에 비해 현저하게 작은 액수다. 청와대 예산에 대통령을 위한 예비비가 책정돼 있음에도 왜 국정원 돈을 받아썼는지 규명돼야 한다.
구속된 전 국정원장은 “청와대 돈으로 알고 줬다”고 했다. 대통령 비자금을 타 부처 예산에 숨기는 관행이 김대중 정부 때 폐지되지 않고 지속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정부는 청와대 상납이 박근혜 정부에서만 되살아 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 정부에서도 있었는지를 밝히고, 국회는 예산회계특례법의 적용 대상 예산의 감축을 포함한 제도 개선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에 대한 대책이 없이 검찰의 일과성 수사로 그쳐서는 재발의 악순환과 정치보복 논란을 면할 길이 없다. 현재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 중인 모든 사건에 대해서도 정부와 국회의 자세는 같아야 하리라고 본다.
임종건 언론인 전 서울경제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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