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계인 캐서린 하이글은 1978년 워싱턴 DC에서 태어났다. 9세 때부터 모델 활동을 했고 틴에이저가 될 즈음엔 연기를 시작했다. 첫 영화는 <아빠는 나의 영웅>(1994)이었다. 이후 <언더 씨즈 2>(1995) 같은 액션 영화부터 <프린스 밸리언트>(1997)의 공주 캐릭터에 <사탄의 인형 4>(1998) 같은 호러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던 그녀는 TV 시리즈를 통해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다. 외계인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하이브리드로 등장했던 <로스웰>(1999~2002)이 그 시작. <그레이 아나토미>(2005~2010)의 ‘닥터 이지’ 캐릭터는 스타덤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성공은 그녀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거만해진 탓일까? 인터뷰에서 실언이 이어졌다. <사고 친 후에>(2007)는 캐서린 하이글을 TV 스타에서 할리우드 스타로 이끈 작품.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선 1억 50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며 깜짝 흥행을 거둔 작품이다. 자신을 로맨틱 코미디의 세계로 이끌었던 이 영화의 홍보 기간에 <베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하이글은 영화를 비난한다. 감독이나 상대역인 세스 로겐과 일하는 건 즐거웠지만 영화 자체를 즐기는 건 쉽지 않았다며, 여성 캐릭터를 성질 더럽고 유머 없는 인물로 그리는 이 영화가 ‘성차별적’이라고 말했던 것. 비록 개런티를 30만 달러밖에 받진 못했지만,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 준 영화에 대해 배은망덕한 언사라는 대중의 비난이 이어졌다.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자신의 은인과도 같은 <그레이 아나토미>에 대해 그녀는 등에 비수를 꽂았다. 하이글은 닥터 이지 역으로 2007년에 에미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는데, 2008년엔 에미상 후보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연기가 후보에 오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시상식의 권위를 위해서라는, 자기 반성적인 성찰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극중 비중이 줄어들자 그 불만은 이런 식으로 표출했다는 의견이 파다했고, 제작진과의 불화는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결국 2010년에 하차한다.
재미있는 건, 그녀의 경력이 곤두박질쳐 나락에 떨어진 2016년에 “다시 <그레이 아나토미>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 한때 “퀄리티가 낮은 드라마”라고 극도의 디스를 했던 입장에선 조금은 황당한 욕심이었다.
하지만 한창 상승세였던 캐서린 하이글은 <어글리 트루스>(2009) <커플로 살아남기>(2010) 등으로 꾸준히 로맨스 퀸의 자리를 이어갔고 개런티도 1000만 달러 이상으로 올라갔다. 이때라도 겸손해야 했지만 증세는 더욱 심각해졌다. <킬러스>(2010) 땐 하이글의 ‘갑질’에 지친 홍보 담당자가 사표를 내고 나갔으며, <뉴욕의 연인들>(2011) 땐 감독과의 불화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때부터였다. 스타덤에 오른 후 최악의 자기 관리를 했던 그녀에게 점점 러브콜이 줄어들었던 것. 업계 경영진들 사이엔 암묵적인 블랙리스트가 돌기 시작했고, 그녀는 더 이상 예전 같은 대접을 받지 못했으며, 대중의 사랑도 시들해졌다.
2015년에 찍은 <제니스 웨딩>과 <불륜녀 죽이기>는 급기야 극장 개봉 없이 다운로드 서비스로 직행하는 수모를 겪었고, 몇 편의 TV 시리즈를 시도했지만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했다. <제니스 웨딩> 땐 후반작업 비용 15만 달러를 조달하기 위해 크라우드펀딩을 조성해야 할 정도였다.
올해 개봉된 <언포게터블>(2017)이 거의 3년 만에 그나마 제대로 배급망을 탄 영화였으니, 그녀가 얼마나 업계에서 밀려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글은 불필요한 소송을 제기하며 좋지 않은 이미지를 더했다. 자신의 파파라치 사진을 홍보에 이용했다는 이유로 어느 드럭 스토어를 고소했던 것. 무려 600만 달러짜리 소송이었는데 법원은 별 고민 없이 하이글에게 패소 판정을 내렸다.
10년 전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신성으로 떠올랐지만 이젠 애니메이션 더빙이나 가끔씩 들어오는 저예산 영화나 그저 그런 TV 시리즈에 만족해야 하는 신세가 된 캐서린 하이글. 그녀의 사례는 할리우드라는 비즈니스 세계 속에서 스타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룰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그리고 결국 블랙리스트에 오른 스타가 갈 곳은 어디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