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의원님이 (특수활동비를) 받았다고요? 칼 맞을 소리예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A 의원실 관계자)
여의도의 말투가 거칠어지고 있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 한때 정권 최고 실세였던 중진 의원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일부 국회의원들이 받아 챙겼다는 설이 번지자 의심을 받는 의원들 보좌진은 가장 강한 어휘를 동원해 강력 부인하고 나섰다. 요즘 여의도에서 특수활동비 공포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경환 의원이 동료 의원들과 악수하는 모습. 박은숙 기자
# 최경환 다음 타깃 누구
박근혜 정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시절인 2014년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 1억 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최경환 의원. 그는 ‘할복자살’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이를 비웃듯 검찰은 최근 최 의원에 대한 강제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1월 20일 최경환 의원실과 경북 경산의 사무실, 서울 자택 등에 대한 압수수색이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압수수색 강도는 예상밖으로 셌다는 평이다. 약 5시간 30분 동안이나 이어진 압수수색에서 수사관들은 최 의원 사무실의 각종 내부 문서와 장부,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 증거 자료를 확보했으며 일부 보좌관의 휴대전화까지 압수했다. 검찰은 압수수색 당시 국회 본관도 찾았다. 일반적으로 국회의원에 대한 압수수색은 의원회관 내 의원실에서만 진행되지만 검찰은 압수수색 당일 국회 본관 사이버 안전센터까지 찾아가 최 의원 보좌진의 컴퓨터 문서를 확인하는 데 필요한 암호들을 파악한 뒤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압수물 분석을 마치는 대로 최 의원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할 방침이며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비추고 있다. 검찰은 특활비 금고지기 이헌수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으로부터 ‘이병기 전 원장의 승인을 얻어 최 의원에게 1억 원을 직접 전달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이 전 실장이 최 의원에게 돈을 건넨 구체적인 날짜, 장소를 진술했고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될 국정원 회계장부 등의 자료도 확보했다.
강제수사가 시작된 만큼 이제 본격화될 검찰 조사에서 최 의원이 국정원 특활비를 전달받아 다른 국회의원들에 대한 로비 등의 목적으로 사용한 정황이 포착된다면, 여러 명의 정치권 인사가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올라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적폐의 대상’으로 몰리고 있는 직전 집권당 자유한국당에는 비상이 걸렸다. 당내에서는 다음 수사 대상이 누가 될 것이라는 얘기들이 나오는 등 술렁이는 모습이다. 국정원이 현직 여·야 국회의원 몇 명에게 특활비를 상납했다는 설과 함께 경북에 지역구를 둔 한국당 의원 등 현역 국회의원 5명의 실명이 담긴 정체불명의 이른바 ‘찌라시’ 내용까지 퍼졌다.
한국당 한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국정원으로부터 상납 받은 특활비 5억 원을 ‘진박(진짜 친박) 감별’에 썼다는 의혹에 김재원 의원이 거명되는 등 앞으로 악재가 줄을 이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며 “자유한국당이 이제는 칼자루를 잃어버렸으니 당분간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특활비 사태는 사실 전혀 예측을 못했던 것이다. 충격파가 어느 정도까지 미칠지 사실 공포스럽다”고 털어놨다. 서훈 국가정보원장은 국정원이 여야 의원 5명에게 특수활동비를 상납했다는 의혹에 대해서 “검찰에서는 모르겠지만 국정원 차원에서는 확인이 안 된다”며 일단 ‘근거 없는 소문’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 국회 특수활동비도 도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국정원 특활비뿐만 아니다. 국회 예산에 편성돼 있는 ‘국회 특활비’도 여의도 사람들로 하여금 초겨울에 진땀을 빼게 하고 있다. 이 역시 ‘검은 돈’으로 낙인 찍히면서 끊임없이 의혹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요즘 국회 특활비 해명 때문에 손가락이 바쁘다. 과거 자신의 국회 특활비 횡령 의혹에 대한 반론을 적극적으로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는 것이다.
홍 대표는 11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문제가 되니 2015년 5월 성완종 사건에 연루됐을 때 내가 해명한 국회 원내대표 특수활동비에 대해서 더불어민주당이 시비를 걸고 있다. 이번 기회에 자세하게 해명하고자 한다”며 민주당이 제기한 특수활동비 사적 유용 의혹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홍 대표는 “국회 여당 원내대표 겸 운영위원장은 특수활동비가 매달 4000만 원 정도 나온다. 나는 정책위의장에게 정책개발비로 매달 1500만 원, 원내 행정국에 매달 700만 원을 지급했고 원내 수석과 부대표들에게 격월로 각 100만 원씩, 또 야당 원내대표들에게도 국회 운영 비용으로 일정 금액을 매월 보조했다”고 했다. 이어 “나머지는 국회 운영 과정에 필요한 경비 지출 및 여야 의원들·기자들과의 식사 비용이 전부”라며 “내가 급여로 대던 정치 비용을 원내활동비로 대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은 급여를 집사람에게 생활비로 줬다는 것이지, 국회 특수활동비를 유용했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홍 대표가 적극적 해명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 원내대표와 간사에게 국회 운영비조로 지원했다”는 말이 오히려 또 다른 설화를 불렀다. 당시 당사자들이 일제히 “돈 받은 사실이 없다”고 반박하면서 진실 공방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당시 통합민주당 원내대표였던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1월 20일 페이스북을 통해 “제1야당 원내대표였던 저는 그 어떠한 명목으로도 홍준표 당시 국회 운영위원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전면 부인하면서 홍 대표의 직접 해명을 요구했다.
홍 대표는 당황한 듯 원 의원의 글이 올라온 바로 다음날인 21일 페이스북에 해명 글을 게재, “당시 일부 야당 원내대표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부분은 내 기억의 착오일 수 있다”며 한 발짝 물러섰다. 홍 대표는 그러나 “국회 운영위원장도 상임위원장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야 상임위 간사들에게 특활비 중 일부를 국회 활동비 조로 지급했을 것”이라고 또다시 주장했고 이번에는 당시 운영위 간사를 맡았던 서갑원 전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가 사실이 아니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
특활비 어디에 얼마나 쓰이나 금배지들의 고백 “이 업무가 정말 특수한가 의문” 특수활동비는 기밀 유지가 필요한 정보 및 사건 수사, 기타 국정 수행 활동에 소요되는 경비를 말한다. 규모는 연간 1조 원에 이르며 19개 정부기관 64개 사업에 편성돼 있다. 국가정보원 그리고 국회와 일반 정부기관 등의 예산에 편성되는데 올해 경우 국가정보원에 4947억 원, 국방부 1814억 원, 경찰청 1301억 원 등이 배정됐다. 특활비는 영수증과 같은 증빙서류가 필요 없다. 기밀유지가 요구되는 국정수행 비용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결국 사후 검증을 받지 않는 특활비는 청와대 등 특활비 용도와 관련 없는 곁길로 언제든지 빠질 수 있다. 검찰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의 남재준 이병기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국정원 특활비 총 40억 원을 박근혜 전 대통령 측에 뇌물로 상납, 국고에 손실을 끼친 혐의를 받고 있다. 국정원 특활비에 이어 ‘2차 특활비 쓰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국회 특활비는 내년 예산안(정부안) 기준으로 볼 때 65억 7000여 만 원이다. 입법 및 선거관리 비용으로 책정돼 있는데 가장 많이 배정된 것이 ‘입법활동 지원’으로 18억 5200만 원이다. 위원회 운영지원 15억 4972만 원, 사무처 기관운영지원 11억 10만 원, 특별위 운영지원 6억 6694만 원, 의원외교활동 5억 5337만 원 순으로 편성돼 있다. 세부내역을 보면 교섭단체 운영지원, 국정감사 활동비, 위원회 활동비, 국가사업검토 활동비, 국제회의 참석, 국회 운영협의지원 등인데 언뜻 봐도 이 업무가 “정말 특수한가”라는 의문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상당수 국회의원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국회의 노른자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돈을 억지로 만들어놨다는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회 사무처는 특수활동비 내역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사무처는 참여연대가 제기한 ‘국회 특수활동비 세부지출내역을 공개하라’는 행정소송 1심에서 패소한 뒤 항소한 상태다. 참여연대는 2015년 국회에 2011~2013년 회계연도 의정지원, 위원회 운영지원, 의회외교, 예비금 세항의 특수활동비 세부지출 내역에 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송을 냈다. 이런 가운데 여야 의원들은 각 기관 예산에 편성된 특활비를 손봐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민주당 제3정책조정위원장이자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간사인 박광온 의원은 지난 8월 특활비 예산 총액편성의 근거를 법에 명시하고, 상임위원회가 요구하는 경우 집행내용을 제출하도록 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자유한국당 내에서도 “비공개로 진행되는 정보위 차원에서 국정원 예산·결산 심사를 받도록 해 특활비가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는 일을 막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자유한국당 한 현역 의원은 “한국당 입장에서는 국정원의 특활비가 청와대로 매월 정기 상납 형태로 들어갔다는 데 대해 고개를 들 수 없다. 그러나 국정원이든, 국회든 내부 통제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 특히 정보기관이 쓰는 돈을 모두 외부에 투명하게 공개하자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안보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잘못하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우게 된다”고 주장했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