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새로운 올림픽 영웅의 탄생은 ‘3일 천하’로 끝났습니다. 도핑테스트 결과 벤 존슨이 ‘악마의 약물’에 손을 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벤 존슨이 ‘스테로이드’ 계통의 약물을 복용한 것입니다. 사흘 만에 금메달을 박탈당한 벤 존슨은 도망치듯 서울을 빠져나갔습니다.
이제 스테로이드는 운동선수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유혹의 손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스테로이드의 무시무시한 부작용입니다. 최근엔 헬스장을 중심으로 불법 유통된 스테로이드 때문에 근육이 괴사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단지 ‘몸짱’이 되고 싶었던 피해자는 평생 동안,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국내에서는 스테로이드 유통이 엄연히 불법입니다. 하지만 해외직구, SNS 구매 등으로 스테로이드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정부 당국은 뒷짐을 지고 수수방관중입니다. 그 사이에 ‘불법’ 스테로이드가 무차별적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일요신문>이 스테로이드 불법 유통의 실태를 낱낱이 공개합니다.
대학부 보디빌더들이 대회에 나오는 모습. 연합뉴스. (사진의 당사자들은 기사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운동선수와 보디빌더들이 가장 많이 쓰는 약물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입니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단백질의 동화를 촉진시켜 신체 근육을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나볼릭’을 생략하고 스테로이드로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테로이드는 원래 고환이 발달하지 않아 테스토스테론이 나오지 않는 환자를 치료할 목적으로 개발됐습니다. 에이즈로 인해 지나치게 체중이 감소한 악액질(cachexia) 환자나 심한 화상이나 신부전처럼 영양공급이 부족한 환자들에게,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스테로이드는 심각한 부작용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골다공증, 당뇨 악화, 우울증, 성 기능 장애가 생길 수 있는 까닭입니다. 심지어 스테로이드를 과다 복용한 보디빌더나 운동선수들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현행법상 스테로이드를 처방전 없이 살 수 없고, 일반인에게 판매 자체가 금지된 이유입니다. 이윤수 이윤수·조성완비뇨기과의원 원장은 “스테로이드는 비뇨기과 전문 약품입니다. 근육 강화를 위한 스테로이드와 성 기능 개선용 스테로이드는 성분이 같습니다. 검사를 해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만 처방합니다”고 설명했습니다.
스테로이드 정보 공유 커뮤니티 J 카페 메인 화면 캡처.
사진이 보이시나요? 보디빌더가 회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테로이드 정보 공유를 위한 J카페입니다. 이곳에서 회원들은 스테로이드 회사, 업자, 약물 사용 후기 등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파마콤, 진트로핀, geneza 등 이른바 ‘언더 회사’들의 스테로이드를 서로 추천해주고 있었습니다.
언더 회사들은 뭘까요? 스테로이드 판매 시장은 제약회사(pharmaceutical)와 언더회사(underground lab). 이렇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쉐링, 오가논 등 세계적인 메이저 제약회사가 생산한 스테로이드는 미국 FDA(식품의약국)의 승인을 받은 약물입니다.
반면 언더 회사는 ‘음성적’인 방법으로 스테로이드를 생산합니다. 이들 회사는 허가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는 국가에서 암암리에 스테로이드를 생산합니다. 소위 말해 후진국들의 조악한 시설들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가정, 창고. 사무실 등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스테로이드를 생산하기도 합니다.
J 카페 회원들이 올린 스테로이드 가품 사용 후기 장면 캡처.
문제는 ‘언더회사’들의 스테로이드 정보가 국내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버젓이 공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메이저 제약 회사의 ‘가품’(가짜 약품) 사용후기가 담긴 ‘인증글’도 넘쳐납니다. 한 회원은 “멕시코에서 공장을 보고 언더를 안 쓰기로 했습니다. 위생적으로 좋지 않았습니다”고 밝혔습니다.
처방전 없는 스테로이드 판매는 약사법상 ‘불법’입니다. 하지만 J카페 회원들은 대회 일정에 맞춰 이퀴포이즈, 프리모볼란 등 스테로이드 복용에 관한 게시글을 올리고 조언을 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작용 후기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J카페 회원이 올린 부작용
10월 8일 다른 회원은 “스테로이드 복용과 운동을 시작한 7주차부터 무기력증이 왔습니다. 여드름, 손톱변형, 오른손 중지에 포진 증상, 포도상구균 감염까지 어마어마한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고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엄청난 부작용을 감내하고 스테로이드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요? 익명을 요구한 아마추어 보디빌더는 “보통 가족에게도 거짓말을 할 정도로 스테로이드 복용사실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보통 몸에 휴식 기간을 주지만 한 싸이클이라도 돌려본 사람은 중독돼서 끊지 못합니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스테로이드를 안 쓰면 기량이 정말 떨어집니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은 ‘약물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의사들이 몸의 체질에 맞게 배합을 해줍니다. 대회에 나가면 도핑테스트로 바로 걸리지만 보디빌딩의 경우엔 서로 눈감아주는 부분이 있습니다”고 귀띔했습니다.
불법 스테로이드 해외 직구 사이트 메인 화면 캡처
더욱 큰 문제는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스테로이드를 구입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진이 보이시나요? 스테로이드 ‘해외직구’ 사이트입니다. 클릭 몇 번이면 타이거제약, 메디테크 등 언더 회사들의 스테로이드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앞서의 J카페에서 해외직구 ‘인증글’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트위터 등 SNS를 통해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11월 21일 취재진은 트위터에 ‘스테로이드 구입’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했습니다. 스테로이드 판매 중개인은 카카오톡 ID를 공개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는 카카오톡 문자 메시지로 접선(?)을 시도했습니다.
스테로이드 중개인과 본지 구예지 인턴기자의 대화 모습
중개인은 “근육을 키우려면 약보다 주사가 낫다”며 키, 몸무게, 원하는 가격대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부작용에 대해서는 “소량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게 없다. 비타민, 오메가3, 간 보호제만 잘 챙겨먹으면 된다”고 답변했습니다.
부작용에 대한 주의사항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처방전은 필요없냐”는 기자의 질문에, 중개인은 “상관없다. 처방을 받으면 이 가격으로 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처방전 없는 스테로이드의 처방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이밖에도 피트니스 센터나 헬스장에서도 이러한 불법 스테로이드가 암암리에 거래됩니다. 특히 일부 트레이너들이 회원들을 대상으로 이를 권하고 몰래 판매하기도 하죠.
<일요신문>과 만난 한 트레이너는 “일부 트레이너들은 여름시즌을 앞두고 염가에 대량으로 불법 스테로이드를 구매합니다”라며 “물론 일부는 본인이 몸 만들 목적으로 쓰지만, 일부는 용돈 벌이를 위해 회원들에게 이윤을 붙여 팔기도 합니다. 특히 여름 시즌을 앞두고 빨리 몸을 만들고 싶어하는 맘 급한 회원들이 주요 타깃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불법 스테로이드가 이렇게 활개를 치는데도, 정부당국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까닭은 뭘까요? 현행법의 ‘허점’ 때문입니다. 약사법 제44조는 “약국 개설자(약국에 근무하는 약사 또는 한약사를 포함한다)가 아니면 의약품을 판매하거나 판매할 목적으로 취득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판매’나 ‘판매’ 목적으로 취득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은 있지만 ‘구매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습니다.
식약처 관계자는 “식약처 차원에서 단속을 한 적은 없습니다. 구매자 처벌 여부는 재판부의 재량입니다. 미등록 의약품 구매에 대해 개별 규제를 하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고 전했습니다.
앞서의 보디빌더는 “정자 수가 감소해서 냉동정자를 통해서 임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작용이 생겨 병원에 가도 불법 투여를 이유로 경찰 조사를 받지는 않았습니다”고 전했습니다.
인천 세관 특송물류센터 전경(좌) x-ray 검색대. 연합뉴스(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도대체 ‘불법’ 스테로이드는 어떤 경로를 통해 국내로 들어올까요? 국경을 넘어 국내로 들어오는 모든 물품은 세관을 거쳐야 합니다. 세관에서는 X-ray와 마약 탐지견으로 반입 물건의 불법성 여부를 판단해왔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불법’ 스테로이드가 단단한 ‘세관’을 뚫고! 밀반입된다는 뜻입니다. 스테로이드는 앰플 형태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세관 X-ray로 식별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2014년 2월 전·현직 보디빌더 4명과 헬스트레이너 7명은 해외브로커에게 물고기 사료와 오일병으로 위장된 스테로이드 알약과 주사제를 국제택배로 배송 받은 혐의로 경찰에 적발됐습니다.
방법도 교묘했습니다. 알약과 주사제를 100개 단위, 10㎖ 단위로 별도 포장한 뒤 상표와 유효기간이 적힌 레이블, 홀로그램을 부착해 해외 정식 의약품인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인천세관 관계자는 “앰플 형태의 스테로이드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은 X-ray뿐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관세청 관계자도 “적발되는 것은 전부 압수합니다. 하지만 미처 압수를 못 했던 것들은 품명을 속인 것입니다.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을 것입니다”고 보탰습니다. 그동안 헬스트레이너나 보디빌더들이 불법 스테로이드를 밀반입한 뒤, 웃돈을 얹어 팔다가 경찰에 붙잡히는 일이 잦았던 이유입니다.
근육 괴사 사건까지 발생했는데도 ‘불법’ 스테로이드는 여전히 판을 치고 있습니다. 법망의 허점과 정부 당국의 소극적인 대처가 문제입니다.
더욱 큰 부작용 때문에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요?
최선재 기자 sun@ilyo.co.kr
구예지 인턴기자 yezyhar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