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에는 막 골수이식을 받은 다섯 살짜리 여아의 병실을 비공개로 방문해 용기를 북돋웠고, 이 같은 사실은 10년 넘게 지난 후에야 청소년으로 건강하게 자라난 아이가 언론에 알리면서 세상에 공개됐다. 이후 마이클은 평생에 걸쳐 자주 병원을 방문하는 선행을 이어갔다. 1977년에는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빈민촌을 방문, 콘서트에 갈 돈조차 없는 가난한 팬들에게 직접 현장 연주를 해준 일화도 있었다.
1984년 12월, 마이클은 순회공연 중 무대에서 일어난 불꽃 폭발 사고로 머리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우연히 병원에서 몸의 90% 이상이 화상을 당해 실의에 빠져 있던 23세 기계공을 만나게 된다. 마이클은 훗날 자신의 후원사인 펩시콜라로부터 벌어들인 150만 달러를 화상 치료기금에 기부해 화제를 낳았다.
그의 기부활동을 더욱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잘나갈 때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이유로 힘들고 어렵던 시기에도 계속해서 기부활동을 이어갔다는 점이다. 잇단 추문과 성형 부작용, 재판으로 고통속의 2000년대를 맞았지만 마이클은 폭우로 손상된 1만여 그루의 나무를 복구하기 위한 프랑스 공연에 참석했고(2000년 1월), 독일지역 홍수 피해자를 위해 직접 사인을 한 개인용품을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2002년 10월).
세간의 시선은 그의 일그러진 얼굴과 아동 섹스 스캔들에만 쏠려 있었지만 마이클은 묵묵히 ‘노블레스 오블리주’(특권층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를 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