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그니타스 건물. 로이터/뉴시스 | ||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는 전신 마비로 침대에 누워있던 주인공 매기가 고통 끝에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던 까닭에 혀를 깨물었지만 이마저도 의료진들의 응급처치 덕분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결국 그녀의 자살을 도운 것은 아버지와 같았던 트레이너였다. 그는 매기의 간절한 부탁으로 몰래 인공호흡기의 스위치를 꺼주었고 그녀는 마침내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이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길 원하는 사람들의 ‘자살할 권리’는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하는 걸까. 자신의 목숨이니까 죽을 권리도 자신에게 있는 걸까.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얼마 전 영국에서는 저명한 지휘자인 에드워드 다운스(85)가 부인과 함께 스위스의 한 자살 병원에서 동반 자살을 해서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됐다. 유명인사의 자살로 인해 다시금 불거진 ‘자살할 권리’에 대한 찬반 논란의 중심에는 스위스의 자살 병원인 ‘디그니타스’가 있다. 합법적으로 환자들의 자살을 돕는 이곳은 어떤 곳이며, 이곳까지 와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사는 것도 존엄하게, 죽는 것도 존엄하게.’
‘존엄’ ‘위엄’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이름을 따온 디그니타스의 슬로건이다.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이곳은 이름과 슬로건이 뜻하는 대로 환자들이 존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자살 지원 병원’ 혹은 ‘안락사 지원 병원’이다.
다운스 부부 역시 이곳에서 치사량의 최면제를 탄 맑은 액체를 마시고 함께 동반 자살했으며, 임종을 지켜본 가족들은 “두 분 모두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고 말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및 로열 오페라 하우스, BBC 필하모닉 지휘자를 역임했던 다운스는 비록 시력과 청력을 상실하긴 했지만 불치병을 앓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내인 조앤(74)이 간암 및 췌장암 말기로 몇 주밖에 살지 못한다는 판정을 받자 함께 죽는 쪽을 택했으며, 결국 자살 지원이 금지된 고향을 등지고 멀리 스위스까지 날아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다운스 부부의 동반 자살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된 디그니타스는 지난 1998년 변호사 겸 기자 출신인 루드비히 미넬리(72)가 설립한 비영리 자선단체다. 이곳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 등 모든 의료진들은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회원들에게는 자살 및 장례 절차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만 받고 있다.
디그니타스가 비영리로 운영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통해 돈벌이를 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행여 병원의 수익을 위해서 자살을 부추긴다는 의혹을 받지 않기 위해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자살을 돕는 행위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스위스에서는 ‘본인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경우 자살을 돕거나 혹은 방조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말하자면 ‘간접적’인 지원은 합법이되 ‘직접적’인 지원은 불법이란 것이다. 가령 의사가 생을 마감하고 싶어하는 환자에게 수면제 등을 처방해줄 수는 있지만 직접 약물을 투약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디그니타스를 찾는 환자들은 본인이 직접 약물을 삼키거나 주사를 놓아야 하며 절대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 만일 환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살을 유도하거나 방조할 경우 혹은 직접적으로 자살을 도운 경우에는 최고 징역 5년에 처해진다.
이런 까닭에 디그니타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환자들이 본인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환자들은 죽기 직전 자신이 온전한 정신으로 스스로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진술서를 작성하는 한편, 비디오카메 라를 통해 자발적인 선택이었음을 육성으로 명확하게 진술해야 한다. 또한 같은 이유로 모든 자살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디오로 녹화되며, 이렇게 녹화된 비디오는 사망 후 검시관이나 경찰에게 증거로 제시된다.
하지만 죽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이곳에 와서 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디그니타스에 회원으로 등록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18세 이상의 성인이어야 하며, 의사로부터 말기암이나 기타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판정을 받았거나 혹은 치료 불가능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 증명된 사람에 한해서만 이곳에서 자살을 할 수 있다.
자살하는 방법은 환자들이 선택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간질이나 불면증 치료에 사용되는 치사량의 바르비투르산염이나 넴뷰탈을 물이나 주스에 섞어 마시거나 혹은 독극물이 든 정맥주사의 밸브를 스스로 여는 방법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극약이 담긴 액체를 마신 후 2~5분이 지나면 서서히 깊은 잠에 빠지게 되며, 잠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30분 내에 고통 없이 숨을 거두게 된다.
의사로부터 극약을 처방받지 못한 경우에는 헬륨가스가 채워진 플라스틱 용기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자살을 하게 된다. 이 방법은 극약을 마시는 방법보다 고통스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통 수분 동안 몸을 떨거나 경련을 일으키다가 사망하게 된다. 따라서 디그니타스 측은 앞으로 헬륨가스보다 고통이 덜한 질소가스로 대체할 것을 고려 중에 있다고 말했다.
▲ 한 줌의 재로… 환자가 숨을 거둔 것이 확인되면 시체는 관에 넣어져 화장된 후 인근 취리히 호수 등지에 뿌려진다. 사진은 사체를 운송 중인 디그니타스 직원들. 로이터/뉴시스 | ||
모든 절차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금까지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처벌을 당한 유가족이나 병원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스위스 안팎으로부터 “자살을 돕는 행위는 엄연히 비도덕적이며 비양심적인 행위”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는 데다 자살 방조나 안락사에 대한 찬반 논란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스위스에는 디그니타스 외에도 자살을 도와주는 단체와 병원이 몇 군데 더 있다. 가령 현재 5만여 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엑시트(EXIT)’는 스위스 최대의 자살지원단체로 지금까지 700명가량이 이곳을 통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디그니타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병원이 아닌 자택에서 죽을 수 있다는 점과 스위스 자국민만 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엑시트가 디그니타스에 비해 비난을 덜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디그니타스의 경우 외국인에게도 자살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스위스 외부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디그니타스의 회원 수는 4000명가량이며, 지난 10년 동안 무려 9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놀라운 것은 이 중 3분의 2가 스위스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란 것이다. 독일인들이 200명 정도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는 117명이 자살한 영국인들이 뒤를 잇고 있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지난 2005년 디그니타스는 처음으로 독일 하노버에 지사를 설립했다. 단 독일에서는 자살 방조가 불법이기 때문에 회원을 모집하거나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운영되고 있을 뿐 현재 이곳에서 직접 자살을 할 수는 없다. 인구 네 명당 한 명이 60세 이상인 고령 국가인 독일은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반면 법적으로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스위스로 자살 여행을 떠나는 독일인들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맨 위 사진부터 설립자 미넬리, 에드워드 다운스 부부, 불치병이 아님에도 자살 원조 받은 대니얼 제임스. | ||
사실 디그니타스를 둘러싼 비난과 의혹은 지난 수년간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3년 전 운동신경원병을 앓고 있던 어머니를 디그니타스에서 떠나 보낸 폴 클리포드는 “어머니의 죽음에는 ‘존엄’ 같은 건 없었다.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말하면서 불쾌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특히 자살이 시행된 아파트가 마치 불법 낙태 수술을 하는 뒷골목의 건물처럼 낡고 지저분했다고 말했다.
사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디그니타스는 엄밀히 말해서 병원이라기보다는 자선단체이기 때문에 상담을 하는 사무실만 취리히 인근에 위치해 있을 뿐 실제 자살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이런저런 이유로 수시로 바뀌어왔다. 가령 아파트를 개인 명의로 임대해서 사용할 경우 엘리베이터로 관을 실어 나르는 문제나 집 앞에 영구차가 끊임없이 드나드는 데 대한 이웃 주민들의 항의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파트를 구하지 못한 경우에는 호텔방이나 캠핑카, 심지어 미넬리의 집에서 자살을 도운 적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투명하지 못한 운영 방식에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아무리 비영리 단체라고 하지만 회원들은 이곳에서 자살을 하려면 일정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우선 입회비로 125유로(약 22만 원)를, 그리고 매년 연회비로 50유로(약 8만 8000원)를 지불해야 하며, 자살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기본비용을 포함해서 장례식 준비 명목 등으로 7000유로(약 1200만 원)를 추가로 내야 한다.
문제는 과연 이 많은 돈이 전부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디그니타스에서 2년 반가량 근무했던 소라야 베르닐이라는 간호사는 “병원이 오로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자살을 돕고 있다”며 병원 측을 고발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는 단체라고 생각해서 지원했다. 하지만 점차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곳은 오로지 돈이 목적인 곳”이라고 폭로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미넬리는 몇몇 갑부들에게 수고비로 막대한 금액의 뒷돈을 받았으며, 홀로 사무, 경영, 회계 등을 모두 담당하고 있어 사실상 미넬리 본인 외에는 환자들이 지불하는 회비의 사용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와 관련해서 일부 스위스 언론들은 미넬리가 사람들의 자살을 도와서 백만장자가 됐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런 의혹이 끊이지 않자 스위스 검찰은 병원 측에 회계장부를 공개할 것을 명령했으며, 지난 1월부터 미넬리는 회비로 부당 이득을 취하진 않았는지,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지는 않았는지, 자살이 병원의 이익을 위해서 시행되고 있는 건 아닌지를 조사 받고 있다. 만일 유죄가 인정될 경우에는 최고 징역 5년에 처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밖에도 불치병이 아닌 사람들의 자살까지 도왔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는 상태. 지난해 부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살한 대니얼 제임스(23)의 경우도 그랬다. 럭비선수였던 그는 연습경기 도중 사고를 당해 전신이 마비됐으며, 절망감 끝에 결국 디그니타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당시 영국에서는 불치병을 앓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허용했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처럼 여러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최근 다운스 부부의 자살로 스위스를 찾는 영국인들이 급증하자 스위스 정부는 부랴부랴 자살 병원에 대한 기준을 엄격히 제한하는 자살지원관련법을 개정했다.
가령 25세 미만의 경우에는 생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경우 자살을 금지하도록 했으며, 정신질환이나 우울증을 앓는 환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심리 검사를 통해 정신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했는지 정확히 판정을 받은 후에만 자살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외국인들이 스위스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자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전문의와의 의무상담시간을 늘렸으며, 극약을 처방하는 의사들이 환자가 죽기 전에 일정 간격을 두고 최소 2회 이상 만나서 자살 의지가 확고한지를 재차 확인하도록 했다.
이런 논란과 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스위스로 자살 여행을 오는 사람들은 당분간 줄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과 독일에서는 고향을 떠나 먼 타국에서 숨을 거두어야 하는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살 지원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고통 속에 살면서 억지로 목숨을 연장하는 것보다는 품위 있게 혹은 행복하게 죽는 쪽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자살할 권리’와 늙어서 병들면 마음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은 자칫 생명을 경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우려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 스위스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진다. 스위스는 오는 가을까지 자살 관련 규정을 보다 엄격히 할 것인지 아니면 전면 금지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 중에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