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실비오 베를루스코니-AP/연합뉴스, 루퍼트 머독 EPA/연합뉴스 | ||
지난 90년대까지만 해도 호형호제하던 둘이 친구에서 적으로 돌변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베를루스코니와 머독은 간간히 만나 함께 오찬을 즐길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서로의 미디어 제국을 확장하기 위한 협력 방안을 모색하거나 덕담이나 조언을 나누는 등 동료애도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당시 베를루스코니는 심지어 자신의 미디어 그룹인 ‘미디아셋’을 머독에게 매각할 생각까지 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격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어쨌든 당시만 해도 둘 사이가 얼마나 막역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상황은 급변했다. 이들이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3년 머독이 이탈리아에 유료 위성 TV 채널인 ‘스카이 이탈리아’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민영방송 3사를 포함해 무료 채널을 장악하고 있던 베를루스코니는 머독의 유료 TV 시장 진출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하지만 경기 불황과 언론시장 구조의 변화로 인해 광고 수익이 점차 감소하자 베를루스코니의 생각은 달라졌다. 뒤늦게 유료 채널 시장에 뛰어든 그는 지난 2005년 유료 디지털 방송인 ‘프리미엄’을 설립하면서 머독의 ‘스카이 이탈리아’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시장의 90% 이상을 선점하고 있던 머독을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카이 이탈리아’는 방송을 시작한 지 불과 6년 만에 470만 명의 가입자를 거느리고 있는 이탈리아 최대의 유료 채널로 급부상했으며, 지난해만 32억 달러(약 3조 90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이탈리아 최대 미디어 그룹인 베를루스코니의 ‘미디아셋(40억 달러(약 4조 9000억 원))’이나 국영방송인 RAI(37억 달러(약 4조 5000억 원))’의 매출에 근접하는 수치였다.
이에 반해 후발주자인 베를루스코니의 ‘프리미엄’은 현재 시장 점유율이 5.4%에 불과한 상태다. 머독의 독주를 막기 위해 베를루스코니가 택한 방법은 다름 아닌 총리라는 지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12월 이탈리아 정부는 유료 위성 TV 채널의 시청료에 대한 부가세를 두 배로 인상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다시 말해서 머독의 ‘스카이 이탈리아’에 대한 세금이 기존의 10%에서 20%로 두 배 인상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법 개정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당연히 유료 TV 시장의 91%를 장악하고 있는 머독이었다.
보코니 대학의 파브리지오 페레티 교수는 “베를루스코니는 머독이 이탈리아에서 벌이는 사업이 거대해질까 두려워하고 있다. 이것이 머독이 달리 이탈리아에서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데도 비난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런 사실을 머독이 모를 리 없었다. 이제 머독이 반격에 나설 차례였다. 머독이 들고 나온 무기는 베를루스코니의 추잡한 사생활이었다. 이미 과거에도 수십 차례 성추문 스캔들에 휘말렸던 베를루스코니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영국의 신문사들을 적극 활용했다. 특히 지난 7월 초에 있었던 G8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베를루스코니의 스캔들에 대해서 매일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베를루스코니의 심기를 건드렸다.
당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던 스캔들은 베를루스코니가 과연 자신의 저택에서 매춘 여성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미 지난 4월 10대 소녀인 노에미 레티치아(18)와의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부인 베로니카 라리오(52)로부터 이혼 소송까지 당했던 베를루스코니로선 분명 껄끄러운 소문이 아닐 수 없었다.
▲ 위부터 머독 소유의 신문 <선데이 타임스>에 실린 베를루스코니와 다다리오의 섹스스캔들과 ‘콜걸파티’ 증언자 몬테레알레. | ||
스캔들이 터지자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영국의 <타임스>와 <선데이 타임스>는 기다렸다는 듯 발빠르게 대응했다. 여러 지면에 걸쳐 스캔들을 구체적으로 보도했는가 하면 다다리오와의 독점 인터뷰까지 실시했다. <선데이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다리오는 로마 저택에서의 하룻밤에 대해서 상세히 서술하면서 당시 저택에는 자신 외에도 스무 명 정도의 여성들이 모여 파티를 즐기고 있었으며 모두들 돈을 받고 파티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여성들 모두에게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의 귀금속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리고 다다리오는 몇 주 후에 또 한 차례 부름을 받았다. 이번에도 역시 지암파올로의 연락을 받고 베를루스코니의 저택에 도착한 그녀는 이번에는 잠자리까지 가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당시 침실의 모습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녹화해두는 한편 대화 내용을 녹음해 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듯 지난 7월 20일 이탈리아의 좌파 주간지인 <레스프레소>를 통해 다다리오의 녹취 테이프가 공개됐다. 테이프에서는 베를루스코니로 추정되는 한 남성이 “나도 샤워를 할 테니 만일 당신이 먼저 샤워를 마치면 먼저 가서 침대에서 기다려라”고 말했고, 여성은 “어떤 침대? 푸틴 침대?”라고 물었다. 푸틴 침대란 러시아의 푸틴 총리가 사용했던 침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녹취 테이프가 공개되자 이탈리아 전역이 들썩였다. 시종일관 성매매 의혹을 부인했던 베를루스코니는 “누군가 나를 모함하기 위해서 꾸민 일이다. 나는 희생자다”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테이프 속 남자의 목소리는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매매 스캔들은 수그러들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더욱 번져만 갔다. 바바라 몬테레알레(23)라는 이름의 또 한 명의 여성이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나도 베를루스코니의 파티에 1000유로를 받고 참석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다다리오의 주장을 입증한 첫 번째 여성이었던 그녀는 “나 역시 지암파올로의 소개를 통해 파티에 참석했으며, 당시 베를루스코니로부터 1만 유로(약 1700만 원)가 든 봉투를 선물로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신문기사뿐만 아니라 머독은 신문광고를 통해서도 베를루스코니를 공격했다. 이탈리아인들이 구독자인 동시에 유권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머독은 베를루스코니 정부의 시청료 인상이 소비자들에게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알리는 내용의 광고를 꾸준히 실었다. 또한 TV 채널을 통해서는 총리 암살을 다룬 영화 <슈팅 실비오>를 방영하기도 했다.
이런 공격에 베를루스코니 역시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영화제작사인 ‘메두사’의 영화가 ‘스카이 이탈리아’ 방송의 전파를 타지 못하도록 금지했는가 하면, 지난 6월 미디아셋 소유의 ‘카날레 5’ 채널에 출연해서는 “내가 ‘스카이 이탈리아’의 세금을 인상하자 일부러 나를 표적 삼아 공격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