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판을 마친 뒤 호송차에 오르는 모습. 최준필 기자
여권 및 사정당국 관계자들 말을 종합하면 2012년 대선이 끝난 후 한 친박계 인사는 대기업 두 곳, 유력 사업가들로부터 100억 원가량의 자금을 모았다고 한다. 대부분 추적이 어렵고 현금화가 쉬운 무기명채권 형태였다. 박 전 대통령 측근 중 한 명으로 꼽히던 이 친박 인사는 박근혜 대선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새로운 정부 출범을 앞두고 실세로 거론됐던 인사이기도 했다.
사정기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파악해보니 그 친박 인사가 주도적으로 돈을 모금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 전 대통령 ‘십상시’ 중 한 명도 가담을 했다. 그 십상시는 박근혜 정권 때 청와대 참모로도 일했다. 이들이 돈을 받은 이유나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선 수사가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친문 핵심 인사도 “대선이 끝난 직후 돈을 받았다는 점에서 정경유착의 병폐 중 하나인 ‘당선 축하금’ 성격이 높다. VIP 모르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그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 반드시 규명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친박 진영은 극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최경환 김재원 의원 등 주요 친박 정치인들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불미스러운 돈 문제까지 불거질 경우 치명타가 불가피하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한 친박 의원은 “자금 부분은 캠프 내에서도 극히 소수만 다뤘다. 박 전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돈 얘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측근들과만 논의했다. 다만, 대선 후 여러 경로를 통해 ‘당선에 대한 인사 차원’에서 돈이 유입됐다고 들었다. 우리끼리 쉬쉬했지만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대선이 끝난 후 친박 내부에선 돈 문제를 놓고 잡음이 끊이질 않았었다. 일부 친박 인사들은 “정산을 해 달라”며 공공연한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당선 축하금도 도마에 올랐었다고 한다. 특정인들이 당선 축하금으로 받은 돈을 독식한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친박 원로 인사는 “챙겨야 할 사람은 많은데 자리가 부족하니 탈이 났던 것이다. ‘기업으로부터 후원받은 돈을 내놓으라’며 항의가 나왔던 적이 있다. 주요 타깃은 캠프에서 자금책을 맡았던 몇몇 친박 인사들이었다. 그들끼리도 돈을 놓고 다퉜다는 얘기가 있었다. 당시 당선 축하금 명목의 돈이 친박 진영으로 유입됐던 건 ‘팩트’”라고 했다.
정치권 반응도 비슷했다. 돈이 건네진 게 사실이라면 그 목적이 불순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자유한국당 친이계의 한 의원은 “정권이 바뀌면 기업들 입장에선 어떻게든 실세들과 줄을 대려 한다. 그래서 예전부터 소위 ‘당선 축하금’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스레 돈을 줬던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이를 활용해 돈을 거뒀고…. 이는 통치자금으로 활용되거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쓰였다. 거의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MB 정권 초기인 2008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긴 했다”고 귀띔했다. 청와대 근무 경력이 있는 국민의당 의원도 “박근혜 정부 인수위 기간이던 2013년 1월 돈이 건네진 것이라면 당선 축하금 성격으로 포장된 ‘뇌물’이 확실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친박 인사들이 받았다는 100억 원 상당의 무기명채권 등은 어디로 갔을까. 여권 핵심부는 정권 출범 후 이러한 내용을 파악하고 은밀히 추적에 나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결과, 무기명 채권 대부분이 현금화됐고 현재 홍콩의 한 금융회사에 예치돼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의 사정당국 고위 인사는 “한 사채업자가 현금화 과정에 개입했는데, 돈을 받은 친박 인사와 아는 관계인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수차례 (무기명채권들을) 현금으로 교환, 이를 다시 해외 조세회피지역으로 송금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돈이 다시 홍콩 금융회사로 예치됐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금융회사의 한 고위 인사가 올해 4월경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비슷한 얘기를 털어놨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정치권에서 넘어 온 비자금을 보관하고 있다. 액수는 100억 원이 조금 안 된다. 박근혜 정부 실세의 친척 한 명과 정부 당국자가 회사 최고위급 경영진과 직접 만나 결정한 일이다. 명의는 그 친척 이름으로 돼 있다. 그 후 여러 번 인출이 돼서 액수는 많이 줄었다. 한국에서 어떻게 만들어진 돈인지는 몰랐는데, 박근혜가 탄핵되는 것을 보고 우리도 불안해 확인을 좀 해 봤다. 정권 초에 만들어져 여러 단계를 거친 뒤, 우리 회사로까지 온 것이었다. 우리는 보관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러한 정황들을 따져봤을 때 당선 축하금 성격으로 친박 인사가 받은 100억 원가량의 자금은 이 금융회사로 흘러갔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여권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내놓는다. 앞서의 친문 핵심 인사는 “홍콩 쪽 금융회사로 그 돈이 갔다는 것은 맞는 것 같다. 누가 돈을 인출해갔는지를 확인해보면 금방 꼬리가 잡힐 것”이라고 했다. 다만, 금융권과 사정기관 관계자들은 이 돈을 추적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정당국의 또 다른 관계자는 “금융회사가 자체적으로 협조해주지 않는 이상 우리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더군다나, 조세회피지역을 몇 번 거쳤을 텐데 이를 쫓는 것만도 오래 걸린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을 잡을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