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씨가 지난 5월 2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이동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이 녹음파일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 씨의 공모관계를 입증할 중요 자료다. 검찰이 이날 법정에서 녹음파일을 공개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자 다수의 언론사들이 취재경쟁에 나서기도 했다. <일요신문>은 검찰이 법정에서 공개하려다 무산된 녹음파일 내용을 확인했다.
검찰이 우선 공개하려던 파일은 2013년 10월 27일자 통화내용이다. 최 씨는 정 전 비서관에게 “대수비(대통령 주재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어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정 전 비서관은 “서유럽 순방이 엿새 뒤라 (일정을 조율하기가) 벅차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최 씨는 “가시기 전에 회의를 하든가”라며 단호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달한다. 난색을 표하던 정 전 비서관은 “예 알겠습니다”라고 답한다.
검찰이 당시 청와대 일정을 확인해본 결과 실제로 박 전 대통령은 출국 직전인 2013년 10월 31일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었다. 최 씨가 사실상 대통령의 일정까지 좌지우지한 셈이다. 정 전 비서관이 얼마 후 “대수비 일정이 잡혔다”면서 “(회의에서) 대통령이 어떤 톤으로 말씀해야 하나요?”라고 묻는 내용도 나온다. 대통령이 회의에서 어떤 뉘앙스로 발언해야 하느냐는 사소한 부분까지 최 씨의 지시에 따랐던 것이다.
최 씨와 정 전 비서관은 박 전 대통령 취임식에 어떤 내용을 포함시킬지 논의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이 발표한 국정 4대 기조 역시 최 씨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확인됐다. 녹취록에서 정 전 비서관은 “‘경제부흥’이란 단어는 최근에는 잘 안 쓰는 단어인데 (최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먹힐 것 같다”고 말했다. 최 씨는 “다 이 기조로 하세요”라고 지시한다.
검찰 측 관계자는 “최 씨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주부인 듯한 인상을 풍기려 한다”면서 “녹취록을 보면 최 씨가 회의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정 전 비서관은 이를 수용하는 입장이다. 최 씨가 굉장히 논리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 씨가 국정에 상당히 깊숙하게 개입했다”고 말했다.
한 언론보도에 의하면 박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과정에서 녹취록을 보고 “정호성은 내 보좌관인데 최순실이 보스입니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일반인의 시각을 담아내기 위해 최 씨에게 연설문을 보내 수정을 지시한 것은 맞지만 그 이상의 국정개입은 자신도 몰랐다는 취지다.
하지만 검찰이 이날 공개하려던 녹취록에는 정 전 비서관이 “선생님과 상의를 좀 해봤는데요”라고 말하자 박 전 대통령은 “예”라고 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검찰은 녹취록에서 정 전 비서관이 최 씨를 ‘선생님’이라고 지칭하는 내용이 수차례 나온다며 정 전 비서관이 언급한 선생님은 최 씨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이 최 씨와 국정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박 전 대통령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국정농단 사건 재판의 핵심은 박 전 대통령과 최 씨 관계를 입증하느냐다. 검찰이 공개하려던 녹취록은 박 전 대통령과 최 씨의 특수한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평가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29일 정 전 비서관 자택에서 업무용 휴대전화 한 대와 개인용 휴대전화 한 대, 대포폰 여러 대를 압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최 씨와 정 전 비서관은 2013년 3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최소한 1484회 통화했으며, 확보된 녹취록만 해도 5시간 분량이 넘는다.
그런데 이날 공개하려던 녹취록은 대부분 과거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내용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녹취록이 많은데 왜 이미 알려진 녹취록을 공개하려 한 것이냐는 질문에 검찰 측 관계자는 “언론에 보도됐었는지 여부는 우리가 따져보지 않았다. 녹취록 대부분이 국정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내용이 대동소이하다”면서 “최 씨의 말 한마디에 대통령 일정이 바뀌는 등 해당 녹취록이 최 씨의 영향력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라 공개하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최 씨가 사심 없이 대통령을 도운 것이 뭐가 문제냐는 주장이 나온다고 하자 “녹취록에 최 씨가 정 전 비서관에게 직접적으로 청탁하는 내용은 없었지만 박채윤 씨(비선진료 김영재 원장의 부인)와 정 전 비서관이 통화하며 여러 청탁이 오간 정황은 확보했다”면서 “박채윤 씨와 정 전 비서관을 연결해준 사람이 최 씨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미 증거로 제출된 녹취록을 법정에서 공개하려 한 이유에 대해서는 “최 씨는 지금까지도 박 전 대통령과의 공모사실을 부인하고 있다”면서 “최 씨는 법정에서 정 전 비서관과의 녹취록을 한 번도 직접 들은 적이 없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직접 들려줘 더 이상 공모관계를 부인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한편 사건 초기부터 이른바 정호성 녹음파일에는 담당 검사들도 깜짝 놀랄 정도의 내용이 담겨 있다는 등의 루머가 떠돌았다. 한 검찰 관계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격을 생각해서 최소한의 것만을 기재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정호성 녹음파일에 더 충격적인 내용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모든 녹취록을 확인해봤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번에 공개하려한 녹취록과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최 씨가 지시하면 박 전 대통령이 쩔쩔 맨다든지) 대중과 언론이 생각하는 그런 충격적인 내용은 없었다”면서도 “일반인인 최 씨가 (중간에 아무도 거치지 않고) 대통령의 최측근인 정 전 비서관에게 직접 전화하고,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녹취내용은 당시 검사들이 듣기에 충분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