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양과의 재회.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운명적이라면 운명적인 만남인데 짧은 인사를 나누는 정도로 만남을 마무리했습니다. 기자가 처음 A 양을 만난 것은 2015년 7월이었습니다. ‘연기 도중 성추행 사건’이 처음 세간에 알려져 화제가 됐을 당시 A 양 측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받은 이메일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여전히 A 양인 그는 실루엣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인터뷰가 이뤄졌고 <일요신문> 1210호를 통해 ‘영화계 발칵 연기 도중 성추행 사건 시작과 끝’이라는 기사와 ‘연기 도중 성추행 사건 피해자 여배우 A 단독 인터뷰’ 등의 기사가 보도됐습니다.
당시 기자는 두 차례에 걸쳐 A 양을 만났습니다. 인터뷰를 위해 한 차례 만났고 며칠 뒤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당시 A 양의 변호사와 함께 만나기도 했습니다. 조언을 부탁하는 A 양에게 기자는 두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우선 상대 남자 배우, 이제는 이름이 공개된 조덕제 씨와의 분쟁도 중요하지만 감독의 책임 소재도 따져봐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조덕제 씨를 직접 만나거나 통화를 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쪽의 반박 내용을 놓고 볼 때 감독이 두 배우에게 서로 다른 연기 디렉션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하반신 성추행을 강조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언론을 통해 보도된 성추행은 상반신에 국한돼 있었는데 인터뷰 당시 A 양은 기자에게 하반신 성추행도 이뤄졌다는 주장을 들려줬습니다. 당시 기자는 기사에 하반신 성추행에 내용도 언급했지만 기사가 나온 뒤 A 양의 변호사가 이 부분을 삭제해줄 것을 요청해왔습니다. 그렇게 당시 기사에서 그 부분은 삭제됐지만 1,2심을 거치며 하반신 성추행(조 씨가 A 양의 바지와 팬티에 손을 넣었다는 주장)이 큰 쟁점으로 부각됐습니다. 현재 조 씨와 A 양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하반신 성추행으로 조 씨는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건 초기 직접 당사자를 인터뷰했던 터라 유심히 이번 사건을 지켜봐왔습니다. 1심에선 조 씨의 승소, 2심에선 A 양이 승소를 하고 이제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갔습니다. 2심 이후 이번 사건이 뒤늦게 달아올랐지만 이미 해당 사건을 후배 기자에게 넘겨준 터라 A 양과 조 씨를 직접 접촉하는 등의 취재는 후배가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이 사건에서 한 발 뺀 상황에서 우연히 A 양을 짧게 스쳐가듯 만나게 된 것입니다.
폭로전 양상까지 치달으며 양측의 분쟁이 거듭되고 있지만 결국 이번 사건은 대법원 판결 내용으로 정리될 것입니다. 법정 분쟁으로 비화된 사건은 법원의 결정으로 마무리됩니다. 1심,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가서 대법원의 결정이 내려지면 그것으로 사건이 종결됩니다. 물론 법원 판결 내용이 모두 진실일 수는 없지만 가장 권위 있고 신뢰성을 가진 결정인 것은 분명하죠.
그렇지만 그렇게 모든 게 마무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 법 감정과 사법부의 결정 사이에는 늘 격차가 존재하고 사법부의 결정과 여론 재판의 향배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례도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미지가 중요한 연예계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재판에선 승소했을 지라도 그 과정에서 너무 심각한 이미지 훼손이 이뤄질 경우 연예계 컴백이 쉽지 않은 사례도 많습니다. 박유천의 사례가 대표적인데 수사기관의 결정은 그가 성범죄자가 아닌 무고와 협박의 피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를 향한 대중의 시선은 매섭기만 하고 연예계 컴백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서울 종로구의 P&T 스퀘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조덕제가 눈물을 삼키고 있다. 임준선 기자
이번에도 대법원 판결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벌써 여론 재판은 치열하게 진행 중입니다. 현재 시점까지 여론의 움직임은 조덕제 씨에게 매우 유리합니다. 분명 2심 판결 내용은 A 양의 승소였으며 결정적인 추가 증거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대법원에서도 조 씨가 불리할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관측입니다. 그렇지만 대중은 조 씨에게 호의적입니다. 행여 대법원에서 패소할 지라도 조 씨의 연예계 활동에는 큰 제약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미 상당수의 대중이 조 씨의 주장과 입장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전쟁, 여론 재판에서 조 씨가 A 양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기자 개인의 관점에선 한 쪽은 조덕제이지만 한 쪽은 여전히 A 양이라는 점이 결정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A 양은 피해자 입장인 만큼 실명을 공개할 까닭이 없습니다. 법적 보호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실명이 공개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매스컴을 통한 공식 호칭만 여전히 A 양이라는 부분은 그다지 실익이 없어 보입니다.
2심 판결 이후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할 즈음 기자는 이런 타이밍에 A 양이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며 눈물의 기자회견까지 열면 여론의 흐름을 완벽하게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실제로 기자회견이 열렸지만 A 양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를 돕는 여러 단체 관계자들이 대신 입장을 전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추후에 A 양은 다시 기자회견을 열고 직접 기자들을 만났지만 여전히 실명이 아닌 A 양을 고수했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사진 및 영상 촬영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기자회견은 기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이를 매개로 대중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눈물의 기자회견은 기자들을 거쳐 매스컴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돼야 비로소 완성이 됩니다. ‘눈물의 기자회견’이라고 반드시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뭔가 대중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기자회견이 더욱 정확한 뜻이 되겠군요.
오히려 눈물의 기자회견이라는 키워드는 조덕제 씨의 몫이 됐습니다. 실명을 공개하고 언론 인터뷰를 한 조 씨는 기자회견을 자청했고 그 자리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무고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호소는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어차피 지금 상황은 양측 모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극한 대립의 연속입니다. 배수진을 치고 폭로전까지 불사하는 상황에서 A 양은 계속 수세적인 입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실명과 얼굴을 모두 공개하고 공세적으로 나오는 조 씨 측의 목소리가 더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니셜 보도는 당사자에 대한 보호 목적으로 활용됩니다. 다시 말해 대중이 A 양이 누군지를 전혀 모를 때, 실명이 공개되지 않았을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2년 반 전 사건 초기부터 A 양의 실명은 공개돼 버렸습니다. 사건 초기 가해자가 조덕제가 아닌 김보성으로 잘못 알려졌기 때문인데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김보성이 “같은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에 오해를 받은 것 같다”고 언급한 게 그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즈음 김보성이 출연한 영화가 한 편 뿐이었던 터라 네티즌들이 너무나 쉽게 A 양이 누군지를 추측할 수 있었던 거죠. 당시 기자는 ‘억울함으로 연 판도라의 상자, 의리의 사나이기에 아쉬운 김보성의 행보’라는 제목의 기사를 작성한 바 있습니다. A 양이 기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계기 역시 이 기사였습니다.
공개된 영화 메이킹 영상. 사진=유튜브 ‘신비한 백과사전’ 영상 캡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다시 한 번 A 양에게 조언을 건넨다면 이미 보호 목적을 상실한 이니셜을 버리고 조덕제 씨처럼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지금부터라도 공세적으로 여론 흐름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부분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대법원 판결 내용보다 여론 재판, 다시 말해 대중의 정서가 훨씬 중요할 수 있습니다. 조덕제 씨는 대법원에서 패소할 지라도 연예계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대중의 지지 기반을 확보해 놓은 상황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A 양은 대법원에서 승소할 지라도 연예계 활동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조덕제 씨에게도 조언을 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 상황에선 조덕제 씨가 훨씬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대법원 판결 내용이 가장 중요하지만 여론은 조덕제 씨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다만 최근 들어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도 사실입니다.
적절한 시점에 실명을 드러낸 언론 인터뷰, 바로 이어진 눈물의 기자회견 등을 통해 대중은 조덕제 씨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디스패치>의 메이킹필름 공개 기사를 통해 조덕제 씨의 주장에 더욱 무게감이 실렸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조덕제 씨와 A 양의 대립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여론이 ‘감독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새로운 방향성까지 인지하게 됐습니다. 충분히 성공적인 여론전을 펼쳤고 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대중에게 알리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대중은 일방적인 여론전에는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실명 공개를 꺼리다 보니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A 양의 행보가 조덕제 씨에게 다소 도움이 됐습니다. 적어도 여론전에선 그렇죠. 그렇지만 대중이 일방적인 구도에 피로감을 느끼게 되면 점차 A 양 측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여론의 힘을 확보한 만큼 이젠 조용히 대법원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