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은 담배와 술을 끊고, 여성들은 반지와 비녀를 내놓았다. 구국의 마음에는 남녀노소, 직업과 계층의 구별이 없었다. 사진은 국채보상운동 성책. 사진=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가가 일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우리 국민들이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벌인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19세기 말부터 제국주의 열강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지에서 식민지 팽창을 꾀하면서 대부분의 피식민지국가에게 엄청난 규모의 빚을 지우고, 그 빚을 빌미로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식을 동원했다. 당시 한국의 경우도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강제적인 차관 공세로 인해 1300만 원이란 거액의 국채를 지고 있었다. 1904년 쌀 한 말(약 8kg) 가격이 160냥이었고, 광무 9년(1905년) 화폐 정리 사업으로 인해 10냥이 1원으로 교환된 점을 감안하면, 이 돈은 지금의 화폐 가치로 최소 120억 원이 훨씬 넘는 거금이었다. 당시 국민들이 외채로 인한 망국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국채보상운동을 벌인 것이다.
이러한 구국운동이 시작된 곳은 대구에 세워진 회사이자 계몽단체인 ‘광문사’였다. 이 단체는 교육 운동을 전담하는 조직인 광문사문회(대동광문회)를 두고 있었는데, 문회의 특별 회의에서 역사적인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거액의 국채를 갚아 망국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국채보상금 2000여 원을 출연했다. 참석자들이 그 자리에서 담배를 끊기로 결의하고 모은 의연금이었다. 또한 참석자들은 이러한 취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국채보상 취지서’를 발표했는데, ‘우리 동포들이 3개월간 담배를 끊어 그 담뱃값을 절약한 돈으로 국채를 갚자’는 내용이었다. 담배가 절제의 대상으로 거론된 것은 당시 일본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던 대표적인 상품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대한매일신보
국채보상운동의 발기 소식이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에 실리면서 전국 각지에서 큰 호응이 일었다. 전국적으로 ‘단연회’(斷煙會)가 조직되고,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남성들은 담배와 술을 끊고, 여성들은 반지와 비녀를 내놓았다. 구국의 마음에는 남녀노소, 직업과 계층의 구별이 없었다. 고종 황제는 ‘금연’을 선언했고, 학교마다 학생들은 스스로 성금을 모았다. 기생과 걸인, 심지어 도적까지도 의연금을 내는 등 전 국민의 약 25%가 이 운동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우리말에 “쌈짓돈을 모아서”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있는데, 모든 국민이 말 그대로 ‘쌈지’(담배, 부시 따위를 싸서 가지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를 턴 것이다.
국채보상의원금영수증
들불처럼 일어나던 국채보상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일본은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폈다. 관계자들을 체포하고 의연금 횡령에 대한 가짜 뉴스도 퍼뜨렸다. 이 때문에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힘을 잃어갔지만, 이 운동이 남긴 역사적 의미와 교훈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국채보상상채회취지서
국채보상운동은 무엇보다도 세계사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것이었고, 가장 긴 기간 동안 전 국민이 참여한 국민적 기부운동이었다는 점, 당시의 역사적 기록물이 유일하게 온전히 보존돼 있다는 점 등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사태 때 한국에서 일어난 ‘금 모으기 운동’은 이러한 우리 국민의 구국 정신과 책임의식을 이어받은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 할 만하다.
참고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종합DB(한국고전번역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