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간을 만든 이들은 방송 PD(허혜련), 회계사(이혜민), 기자(김포그니), 의사(홀리·가명), 변호사(박정하)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5명의 30대 여성이다. 어쩐지 예술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들이 ‘가능세계’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살롱 ‘가능세계’는 20~30대 청년 예술가들에게 작품활동을 위한 공간 기부를 하고 있다. 사진=가능세계
-왜 이름이 ‘가능세계’인가.
허혜련(허):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철학 중 ‘가능세계’라는 이론이 있다. 상상하는 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세계라는 뜻이다. 이처럼 각자의 가능성을 현실화하자는 의미에서 이름을 지었다.”
허 씨는 한 주요 케이블 방송사에서 프로그램 대외 마케팅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10년차 전문 방송인이다. 오랜 기간 밤잠 못자고 성공의 길을 걷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른 의미에서 유의미한 일을 하고 싶다.”
김포그니(김): “3년 전 고등학교 동문인 박정하 씨(이하 ‘박’)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얘기를 하다가, 미국 시인 ‘거트루드 스타인’처럼 살롱을 만들어 예술가들을 지원해주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영화에서 스타인은 소설가 헤밍웨이, 미술가 피카소 등을 후원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우리 꼭 하자’고 약속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지난해 12월 ‘실천에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세계’의 내부 풍경. 사진=가능세계
이후 지난 3월 김 씨는 ‘가능세계’를 설립할 장소를 찾다가 우사단로를 발견했다. 우사단은 조선시대 선조들이 하늘에 비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 있던 신묘한 곳이다. 가능성을 꿈꾸며 빌고,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장소였던 것.
김: “지명의 유래도 좋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가게가 눈에 띄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에 ‘임대문의’도 적혀있었다. 홀린 듯 들어갔는데 느낌이 좋았다. 그날 바로 계약했다.”
-‘가능세계’가 처음에 후원한 이들은 누구였나.
이혜민: “일단 우리부터 숨겨진 ‘가능성’을 찾아보려 했다. 나의 경우 그 과정에서 캔들 아티스트로서 잠재력을 발견했다. 조만간 이곳에서 캔들 클라스를 열 예정이다.”
이 씨는 현재 국내 주요 회계법인에서 활동 중이다. 이제 11년 차 회계사, 남들은 부러워하는 직장을 가진 이씨는 ‘가능세계’를 설립하며 “인생에 새로운 동기부여가 되는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직장 퇴근 후 혹은 주말에 뭔가를 배우러 다닌다. 자신의 가능성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가 아닐까.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예술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각자의 가능성을 꺼내 보이고 서로 배우는 시간을 갖자는 ‘가능세계’의 취지가 마음에 들었다. 일종의 가능성들을 ‘연결’해주는 공간인 것이다.”
-어떻게 젊은 예술가들에게 장소를 제공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나.
김: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20~30대 청년들을 만났다. 1980~1990년대 생들은 재능도 많고 똑똑하다. 그런데 내 또래 세대에게는 ‘자기만의 공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의외로 많은 수의 20~30대 청년 예술가들이 자기만의 작업실이 없다. 공간이 없어 이런저런 가능성을 못 피우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에 ‘가능세계’의 주인 5인방은 평일 아침, 낮에 무료로 공간을 대여해주기로 결정했다. 청년 예술가들이 공간을 빌리려는 취지와 앞으로의 계획 등을 설명하면, 약간의 심사를 거쳐 완벽한 혼자만의 작업실을 얻을 수 있다. 일종의 ‘공간 기부’인 셈이다.
현재 평일 낮에는 청년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으로 활용되고, 평일 저녁과 주말은 청년 예술가들의 전시회 혹은 주인 5인방이 운영하는 ‘가능성의 연결’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동안 ‘가능세계’에서는 향초 만들기, 칵테일 주조 등의 클래스가 진행됐다.
이: “이렇게 우리의 가능성, 타인의 가능성이 서로 ‘연결’되면서 근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다보니, 정말 뭐든지 가능한 세계로 진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일례로 허혜련 씨는 이곳에서 본인의 ‘장기’였던 브랜딩 실력을 펼쳤다. ‘가능성을 연결한다’는 공간의 ‘모토’는 그의 아이디어다. 이 살롱의 인테리어는 그와 브랜드 디렉터 김신혁 씨의 작품이기도 하다. 지난 10월에는 김 씨를 주축으로 계간 페이퍼 ‘가능세계’가 발행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가능성을 찾은 예술가들의 인터뷰와 에세이가 담겼다. 이 과정에서 ‘가능세계’의 취지에 공감한, 현직 미술 편집 디자이너들이 재능기부를 해줬다. 이들은 이번을 계기로 프로젝트 그룹 ‘뿌리구슬’을 설립해 자신들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찾고 있다.
-낯선 이들의 ‘가능성’을 잇는 방법이 있다면.
허: “공간 앞에 ‘가능세계에서 배우고 싶은 거’나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을 적어달라는 설문지를 배치해 놨는데 대략 80건 정도가 모였다. 무궁무진한 가능성들이 모인 것이다. 공간을 기부할 테니, 자신이 가진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종의 콜라보(협업)를 앞으로 펼쳐질 예정이다. 멋지지 않은가.”
‘가능세계’의 내부 풍경. 사진=가능세계
“여기는 뭐하는 곳이에요” 가능세계가 처음 열었을 때 행인들이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다. 그때마다 주인 5인방은 마치 ‘살롱’처럼 무료로 차를 대접하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홀리: “‘편히 쉬다 가세요’라는 말에 행인들은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기도 했다. 한 20대 여성은 아무 설명도 없었는데, 아무 말 없이 들어와 구석 소파에 앉아 책을 읽다가 가더라.”
홀리는 한 대학병원의 응급의학과 의사로,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데 익숙하다. 그는 어느 날 “난 이런 가능성이 있는데 어떻게 풀어야할지 모르겠다”는 어떤 행인의 이야기를 밤새 들어준 경험이 있다.
홀리: “타인의 아무 말이나 다 들어주는 날도 있었다. ‘가능세계’라는 간판에 이끌려 왔다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털어 놓더라. 가능성이 있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이들에게, 상황에 따라 필요한 사람을 소개시켜주기도 한다. 일종의 상담소인 셈이다.”
이렇듯 ‘가능세계’는 예술가의 작업실, 다양한 가능성을 펼치는 살롱, 그리고 상담소로 이용되며, 20~30대 세대를 지원해오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만 소정의 비용을 받고 공간을 임대할 계획이다. 늘 재정은 마이너스이지만, 조금이라도 수익이 날 경우 청년 예술가들을 위해 기부될 예정이다.
-그동안 수익은 어느 정도 발생했나.
박정하(박): “항상 마이너스다(웃음). 애초에 돈을 벌려고 만든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멤버 모두 불만이 없다.”
그는 변호사지만,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사랑했고 예술가를 동경했다. 박 씨는 “클래스 등 가능세계를 통해 수익이 나오면 그 돈은 용산구청 등에서 하는 청년 아티스트 지원 사업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오는 9~10일 가능세계와 콜라보로 열리는 가방 아티스트 그룹 ‘세이모온도’ 전시회 포스터. 사진=가능세계
오는 12월 ‘가능세계’는 예술가를 후원하는 특별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박: “지난 10월 그림도시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본격적으로 가능세계를 대중에 알리는 오픈 파티를 열었다. 경이로운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가방 아티스트그룹 ‘세이모온도’를 이때 만났다. 이들은 오는 12월 9~10일 가능세계에서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세이모온도’는 가방 아티스트그룹으로, 그동안 창작한 제품이 중국, 일본 등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성공한 30대 청년 아티스트인 이들은 자신의 첫 번째 전시회를 ‘가능세계’에서 열 계획이다. 이들은 “‘청년의 가능성을 후원한다’는 취지가 마음에 들어, 무료 전시회를 열게 됐다”고 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유명 사진작가 릭키 심(Ricky Shim)도 참여한다.
세이모온도의 디자이너 강수연(왼쪽)과 사현진. 사진=가능세계
이번 전시회를 시작으로, ‘가능세계’는 전시를 원하는 무명의 청년 예술가들에게 전시 공간을 후원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예정이다. 차후 ‘가능세계’에서 전시회를 여는 예술가들에게는 ‘세이모온도’ 등 시장에서 성공 경험이 있는 동료 예술가와의 대화를 통해 현장에서의 노하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김: “영국 작가 조앤 K. 롤링도 처음에 집 근처 카페에 나와 ‘해리포터’ 시리즈를 집필했다. 나중에 그 카페는 ‘해리포터의 탄생지’로 명소가 됐다. 가능세계를 이용한 사람들 중에서 훗날 조앤 K. 롤링 같은 세계적인 작가가 나왔으면 좋겠다.”
박: “지금도 이메일을 통해 예약을 받고 있다. 젊은 아티스트들의 연락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우리는 예술 재능이 없지만 대신 ‘공간’을 만들어 후원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하는 ‘가능세계’의 5인방. 이들은 끝으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청춘의 시간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1980~1990년대 생들이 멋지고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다. ‘가능세계’는 작은 공간이지만 당신의 가능성을 응원하고 지지하겠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