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가드가 18년간 감금돼온 납치범 가리도의 집 뒷마당. | ||
한편 미국에서는 최근 성범죄자들의 ‘신상정보 공개’와 ‘전과자등록제도’에 대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어 이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공안전을 위해 실시한 제도가 오히려 해가 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도입 여부가 논의되고 있는 제도인 만큼 과연 어떤 부작용들이 있는지 짚어봤다.
아동 성범죄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기로 유명한 미국에서는 이미 1994년부터 이른바 ‘매건법’이라 불리는 ‘성범죄자 신상정보공개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50개의 모든 주에서 실시되고 있는 이 제도는 매건 칸카라는 소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일곱 살이었던 소녀는 강아지를 보여주겠다며 유혹한 앞집 아저씨의 꼬임에 넘어가 성폭행당한 뒤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사건이 발생했던 뉴저지주에는 사형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범인은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이 사건 후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던 것은 물론이었다. 가장 큰 논란이 됐던 것은 범인이 전과자라는 사실이었다. 미국인들은 ‘만일 매건의 부모가 앞집 남자가 성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고, 이를 계기로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매건법’이 제정되었다.
이밖에도 2005년 플로리다주에서 제정된 ‘제시카법’은 ‘매건법’을 보완한 것으로, 12세 미만의 아동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 최하 25년의 징역형과 함께 출소 후에도 평생 전자팔찌를 착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편 지난 2003년 미 연방의회는 ‘엘리자베스 스마트 사건’을 계기로 전과자가 재범을 저지를 경우 의무적으로 종신형을 선고받도록 하는 한편, 공소시효를 없애는 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현재 미국의 대부분의 주에서는 아동 성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없으며, 이는 31년 전 13세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LA 검찰에 기소됐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최근 스위스에서 체포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미국의 모든 주에서 동일하게 실시되고 있는 ‘매건법’은 지금까지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서 커다란 호응을 얻어왔을 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독일 등 다른 나라에서도 벤치마킹할 정도로 성공적인 사례로 꼽혀왔다. ‘매건법’에 따르면 경찰은 성범죄자의 명단과 함께 이들의 얼굴, 나이, 집주소, 지도, 전과 내역 등 모든 신상정보를 홈페이지에 올려놓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원한다면 누구라도 조회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또한 경찰에 의해 아동 성범죄자로 등록된 사람은 이사는 물론, 직장을 옮길 때마다 관할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아동 성범죄를 예방하는 데 적절한 해결책이라고 여겼던 이 제도에도 부작용과 한계가 드러나고 있어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 제도의 한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것은 최근 발생했던 ‘제이시 두가드 납치 사건’이었다. 온 미국을 다시 한 번 충격에 빠뜨렸던 이 사건은 지금까지 굳게 믿고 있었던 성범죄자 관리가 사실은 얼마나 허술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잘 드러냈다.
18년 전 캘리포니아주 레이크 타호에 있는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필립 가리도(58)에게 납치됐던 11세 소녀 두가드가 지난 8월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온 미국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자 기쁨은 곧 충격으로 바뀌었다. 두가드가 납치범에 의해 주기적으로 성폭행을 당해왔고 그 결과 각각 11세, 15세 된 두 딸을 낳았다는 점, 18년 동안 뒷마당의 오두막에 감금되어 있었다는 점 등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던 것은 가리도가 이미 성범죄 전력이 있는 ‘전과자’라는 사실이었다. ‘매건법’과 ‘제시카법’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었다면 이런 일이 쉽게 벌어질 수 없었을 텐데 말이다. 가리도가 18년 동안이나 경찰의 감시를 피해 두가드를 뒷마당에 숨겨놓고 있다는 사실에 미국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1971년 네바다주에서 납치 및 성폭행을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된 후 가석방 상태였던 가리도는 ‘매건법’에 따라 모든 신상정보가 공개된 것은 물론, 매년 경찰에 거주지를 신고하는 한편, GPS 시스템으로 위치를 추적당하는 등 여느 전과자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3년 전에는 “아이들이 이상하게 뒷마당에서 텐트를 치고 살고 있다”는 이웃집의 신고로 출동했던 경찰이 집안을 수색하고도 아무런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동안 정기적으로 가리도를 감시했던 관할 경찰은 단지 그가 별다른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모범수였다는 점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리를 소홀히 했던 점을 시인해 원성을 사기도 했다.
▲ 가리도(왼쪽)와 두가드. | ||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1994년 4만 5000명이던 성범죄자 등록 수는 지난 2008년 9만 명으로 두 배나 급증했다. 이 가운데 2만 명은 가석방된 후 보호감독관의 감시를 받고 있으며, 현재 감독관 한 명당 적게는 40명에서 많게는 70명까지 관리해야 하는 실정이다. 대럴 리틀톤 보호감독관은 “경찰 한 명당 20명 정도를 관리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지적하면서 40명을 감독하는 자신 역시 제대로 된 감시를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관리가 소홀하면 성범죄자의 경우 재범 확률이 높다는 특성상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사고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가령 리틀톤의 감시를 받던 한 범죄자는 얼마 전 10대 매춘소녀를 성폭행한 혐의로 다시 교도소로 돌려보내졌으며, 9세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12년을 복역한 후 가석방됐던 한 70세 노인은 초등학교 근처를 서성이다가 몰래 전자발찌를 풀고 도망을 가버리기도 했다.
이처럼 폐해가 속출하자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조만간 감독관 한 명당 평균 70명을 관리하는 현행법을 45명으로 낮추는 법안을 통과시킬 예정이다.
성범죄자 등록 건수가 급증하고 있는 까닭은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법이 강화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범죄의 심각성을 배제한 채 모든 성범죄자들을 동일하게 명단에 등록시켜놓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주에서 보호감독관의 감시를 받고 있는 2만 명의 가석방 성범죄자 가운데 재범 위험이 높은 강력범은 9%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초범이거나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사과나 오렌지를 구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묶어서 등록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가령 미성년자들이 서로의 동의 아래 성관계를 맺은 경우, 서로에게 휴대폰으로 알몸 사진을 전송한 경우, 불특정 다수에게 성기를 노출한 경우도 모두 강력범인 아동 성범죄자들이나 강간범과 함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사춘기인 미성년자들의 경우 자신들의 신상정보가 변태 성욕자들과 함께 평생 성범죄자로 등록되어 있을 경우 훗날 정신적 피해와 후유증을 겪게 된다는 점도 문제다.
조지아주에 거주하는 재닛 앨리슨의 경우 15세 딸이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묵인했다는 이유로 아동 성범죄 방조죄가 적용돼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평생 성범죄자로 등록되는 수모를 겪었다. 심지어 딸아이와 남자친구가 훗날 결혼까지 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이런 처벌이 가혹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범죄를 다시 저지를 확률이 비교적 낮은 청소년들이나 사람들까지 일일이 감시하다 보니 경찰로선 실제 두가드 납치범처럼 위험한 범죄자들의 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성범죄자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는 미국의 성범죄자들의 수는 67만 4000명 정도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는 버몬트주나 와이오밍주의 인구보다 많은 것이다.
또 다른 문제로는 생각보다 성범죄자들이 경찰로부터 치밀하고 세밀하게 감시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수의 범죄자들이 버젓이 다른 곳으로 이주한 후 1년에 한 번씩 자신의 집주소가 적힌 엽서를 경찰에 보내는 것으로 의무를 대신하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 많은 범죄자들이 손쉽게 거짓 주소를 제공하거나 경찰의 눈을 피해 도망을 치기도 한다. 이와 달리 두가드 납치범처럼 상대적으로 성실하게 의무를 수행할 경우에는 자연히 경찰의 감시가 느슨해지고 결국은 또 다른 범죄를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성범죄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또 다른 범죄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2006년 캐나다의 한 청년이 미국의 메인주에 거주하는 두 명의 성범죄자를 총으로 쏴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의 이름과 주소, 사진을 메인주 성범죄자 웹사이트에서 열람한 청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피해자 둘의 죄질이 전혀 달랐다는 데 있었다. 한 명은 19세 때 당시 16세였던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체포됐었던 반면, 다른 한 명은 14세 미만의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체포됐었던 것이다. 둘은 별다른 구분 없이 성범죄자 명단에 나란히 등록되어 있었으며,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 둘 모두 그저 파렴치한 성범죄자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사건 후 미국에서는 모든 성범죄자의 명단을 공개할 것인지, 또 공개한다면 어느 정도까지를 공개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문제가 속출하자 성범죄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범죄의 강도에 따라서 데이터를 분류해서 관리해야 하는 것은 물론, 고위험군에 속하는 범죄자들을 따로 묶어 집중 감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루이스빌 대학의 리처드 트윅스베리 법학교수는 “사람들은 전과자등록제도를 마치 만병통치약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은 전혀 다르다”고 충고한다. 그의 말처럼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던 제도에 발등을 찍힌 미국인들은 ‘제2의 가리도’가 나오지 않도록 서둘러 보완책을 마련해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