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황 회장이 곱게 물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제가 살아온 과정과 이 정부를 끌고 가시는 분들의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3년여 전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금투협회장에 발탁됐던 황 회장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연임 의지를 내비쳤던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연임을 돌연 포기한 까닭에 대해 궁금증이 일고 있다. 연합뉴스
금융투자협회장은 금융권 협회 중 은행연합회장에 이어 ‘넘버2’로 꼽히는 자리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선물회사 등 국내 금융투자업계를 대표하는 자리로, 금융당국에 정책을 건의하고 회원사의 투자규정 등을 자율적으로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장외 주식시장과 채권시장 운영을 주관하는 것도 금융투자협회의 몫이다. 약 160개 회원사가 내는 연회비는 600억 원에 달하고, 협회장 연봉은 5억 원에 이른다.
11월까지만 해도 황영기 금투협회장의 연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검투사’라는 별명답게 취임 후 초대형 IB(투자은행) 승인을 위해 은행권과 얼굴을 붉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등 업계 이익을 위해 직접 뛰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수동적이던 과거 일부 협회장들과 달리 정치권과 정부를 상대로 몸을 던지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회원사들의 지지도가 높았다”고 전했다.
황 회장도 스스로 연임 의지를 갖고 있음을 수차례 피력했다. 그는 지난 11월 21일 열린 한 행사에서 “협회장 선거가 내년 1월 말이라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 다른 곳의 인선 등을 봐서 연임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연임 여부는 올해 12월 말에 밝히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기류는 불과 1주일여 만에 급변했다. 지난 11월 29일 ‘장기 소액 연체자 지원 대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연체자 지원 대책과 거리가 먼 말을 했다. 당시 최 위원장은 “대기업 그룹에 속한 (금융협회) 회원사 출신 분들이 그룹의 도움을 받아서 계속 회장에 선임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일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나오자마자 금융권에서는 삼성그룹 출신인 황영기 회장을 염두에 둔 것이란 분석이 쏟아졌다.
현재 금융 유관협회 중 대기업 출신 민간 인사가 수장인 곳은 이수창 생명보험협회 회장과 황 회장 정도다. 이수창 회장의 경우 이미 후임자가 결정돼 사실상 물러난 상태이니만큼 최 원장이 언급한 인물은 결국 황 회장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실제로 이 발언이 나온 지 채 1주일도 되지 않아 황 회장은 갑자기 퇴진을 공식화했다. 그는 지난 4일 사내 게시판을 통해 “연임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같은 날 기자간담회에서도 “현 정부와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외교 용어로 나는 척결 대상이나 사형 대상은 아니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와 같았다”고 말했다. “현직 프리미엄을 누리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하고 싶지 않았다”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회원사도 많다는 점을 확인해 연임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황 회장은 이날 작심한 듯 “결이 다르다”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하며 현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는 “지난달 말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기업신용공여 한도를 200%로 늘리는 방안이 통과됐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면서 “현재의 많은 정책을 보면 생각과 다른 것들이 있고 국회 쪽에 건의해도 잘 통하지 않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나쁜 짓도 아니고 (부작용에 대한) 여러 통제장치가 있는데도 고생했다”고 돌직구를 던졌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의 일침에 대기업 출신 인사들의 금융기관 수장 자리가 차단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황영기 회장은 삼성그룹 출신으로 그룹 내 금융전문가로 꼽히던 인물이다. 1975년 삼성물산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황 회장은 1980년까지 삼성물산 국제금융에서 근무한 뒤 프랑스 파리바은행 차장, 미국 BTC은행 부장 등을 거친 뒤 1989년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국제금융팀 담당부장을 역임했다. 이후 1994년 삼성전자 자금팀장, 1997년 삼성생명 전략기획실장을 거쳐 2001년 삼성증권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2015년 금융투자협회장에 당선됐다.
일각에서는 최 위원장의 발언이 황 회장 ‘찍어내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앞으로 있을 주요 은행 최고경영자(CEO) 인사에서 정부가 일종의 인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금융권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넛지 관치’로 진화할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최 위원장이 대기업 출신 인사가 협회장 자리에 앉는 것을 경계한 만큼 차기 협회장도 대기업과 관련된 인사가 선임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금융권에서 차기 회장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대부분 투자업계 출신 인사들이다. 김원규 NH투자증권 대표, 최방길 전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대표, 김봉수 전 한국거래소 이사장, 홍성국 전 미래에셋대우 대표, 정회동 전 KB투자증권 대표와 황성호 전 우리투자증권 대표 등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금융권은 특히 최방길 전 대표를 주목하고 있다. 강원도 강릉 출신인 최 전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희대 법학과 선배이자 최종구 금융위원장의 고교 선배다. 얼마 전 거래소 이사장 선임 당시 후보로 등장해 정지원 현 이사장과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정회동 전 KB투자증권 대표와 황성호 전 우리투자증권 대표 역시 차기 금투협회장 자리에 강한 의지를 보이는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2014년에도 협회장 선거에 나섰다.
정 전 대표는 이미 협회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회원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일정을 짜고 있으며, 공약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6년생으로 용산고등학교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정 전 대표는 LG투자증권 부사장, 흥국증권 사장, NH농협증권 사장, 아이엠투자증권 사장, KB투자증권 사장 등을 거쳤다.
황 전 대표 또한 협회장 출마를 긍정적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953년생으로 경희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씨티은행을 거쳐 다이너스카드 한국대표, 아테네은행 공동대표 부행장, 제일투자신탁증권 대표이사, PCA자산운용 대표, 우리투자증권 대표 등을 역임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요즘 금융권 수장 선임은 깜짝 발탁이 대세인지라 누가 될지 전망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다른 협회나 금융사들이 그러했듯, 막판에 급부상하는 인물이 나오느냐 여부가 가장 큰 변수”라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