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원 25명이 자살한 프랑스텔레콤의 근로자들이 업무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로이터/뉴시스 | ||
주당 35시간 근무, 최고의 복지 혜택, 평생 직장 그리고 평생 연금 등 소위 말하는 ‘꿈의 직장’으로 부러움을 샀던 프랑스 텔레콤에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공기업이었던 프랑스 텔레콤의 직원들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4년부터였다. 민영화된 후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시작되자 무더기 해고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구조조정의 칼끝에 잘려나간 사람들은 모두 6만여 명.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전체 직원의 3분의 2가량이 과거 공기업 시절 입사한 공무원 신분이란 점이 구조조정의 근본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9월 30일 프랑스 남동부의 작은 도시 안시. 출근길 고속도로의 한 육교 위에서 중년의 남성이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이름은 장 폴 루아네(51). 두 아이의 아빠이자 가장이었던 그는 프랑스 텔레콤의 고객센터에서 일하고 있던 콜센터 직원이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열악해진 회사의 근무 환경을 견딜 수 없어 목숨을 끊는다”라며 비통한 심정을 밝혔다. 본래 기업 상담 부서에서 일하던 그가 일반 고객들을 상대로 하는 ‘리액티브 콜센터’에 배치된 것은 6개월 전이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안시에 있는 콜센터로 자리를 옮겨야 했고, 이곳에서는 기존의 업무와 달리 일반 고객의 불만사항이나 문제점을 상담하는 일 외에도 회사의 상품을 판매하는 영업직도 겸해야 했다. 한 직장 동료는 “그는 아무런 교육도 없이 그렇게 버려졌다. 그래선 안 됐다”고 말했다.
현재 루아네처럼 원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거나 근무지를 이동한 직원들은 전체 10만 명 가운데 절반이 넘고 있다. 또한 7만 명가량이 수시로 직무가 바뀌면서 전환 배치되고 있으며, 특히 40~50대 직원들의 경우 20년 넘게 일해오던 사무직이나 기술직에서 갑자기 콜센터나 영업소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아져 문제가 되고 있다.
가령 지난 9월 바르비투르산염을 마시고 자살했던 53세의 한 여성 직원은 올 들어 세 번째로 부서를 이동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는 절망감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처럼 수많은 직원들이 떼지어 부서를 이동하는 일이 잦아지자 한 직원은 “마치 소떼처럼 직원들이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며 비참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프랑스 텔레콤의 노조 측은 직원들이 자살하는 주된 원인이 바로 이런 업무 전환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측은 직원들에게 전환 배치를 강요하는 이유가 이들을 강제로 해고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한다 하더라도 직원들을 해고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프랑스에서, 더군다나 과거 공기업 시절에는 엄연히 공무원이었던 직원들을 해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그만두거나 부서를 옮기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과 휴대폰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입사했던 40~50대 직원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갑작스러운 업무 전환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20년 동안 전화선 등 케이블을 수리하던 기술직원에게 다음날부터 모바일 관련 업무를 맡으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통신 기술의 변화로 일거리는 줄고 직원 수는 그대로이다 보니 자연히 남는 인력은 고객센터와 같은 엉뚱한 부서로 전환 배치되기 시작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고객 상담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어떤 경우에는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상품을 팔아야 할 때도 있다.
프랑스 텔레콤의 한 노조 간부는 “많은 사람들이 판매 영업직을 꺼려한다. 특히 나이가 든 중년의 경우에는 더 심하다. 프랑스 텔레콤의 직원들 평균 연령이 48세라는 점을 감안하면 심각한 문제다”라고 지적한다.
지난 9월에는 트루와 지사에 근무하던 한 49세의 기술직 직원이 회의 도중 부서 이동 조치에 항의하는 의미로 칼을 꺼내 할복자살을 시도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는 일도 발생했다.
엄격한 업무 환경과 과도한 업무량도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기는 마찬가지다. 현재 각 콜센터에는 150명가량이 근무하고 있으며, 10~12명 당 보통 한 명의 매니저가 있다. 한 콜센터 직원은 “언제 화장실에 가는지, 언제 식사를 하는지, 언제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지 등등 이곳에서는 직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있다. 심지어 와이파이 이어폰과 마우스피스를 갖고 다니면서 쉬는 시간에도 전화 응대를 해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수리센터 직원들의 경우에는 구조조정으로 부족해진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야근이나 대기 근무를 서는 일이 잦아지자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8월 자살한 니콜라(28)는 브장송 지사의 수리센터에서 기술직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동료 직원들과 그의 여자친구는 평소 그가 과도한 업무량과 열악한 근무 환경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말했다. 매주 최소 48시간은 대기 근무를 서야 했고, 죽기 직전 4주 동안은 행여 발생할지 모르는 폭풍이나 자연재해로 전화선이 불통이 될 것에 대비해 퇴근 후에도 항상 대기 상태에 있어야 했다. 해고당할까 불평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 벼랑 끝에 내몰렸던 그는 결국 자신의 집 차고에서 회사에 대한 분노를 적은 유서를 남긴 채 목숨을 끊었다.
이보다 앞선 7월에는 마르세유 지사의 52세 직원이 “업무가 너무 과중하다” “업무 관리가 마치 테러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자살하는 이유는 프랑스 텔레콤의 업무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일부 정신과 전문의들은 프랑스 텔레콤 직원들 사이에서 일종의 자살 모방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찰스 세브리엥 정신과 전문의는 “자살에는 전염성 같은 게 있다. 안 그래도 동료들의 잇단 자살로 혼란스러운 직원들에게 언론 보도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람 잡는 기업’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프랑스 텔레콤 측은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느라 바쁜 모습이다. 23번째 자살자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뒷짐만 지고 있다가 비난을 샀던 사측은 뒤늦게 무료 상담 핫라인 설치, 심리 상담사 배치, 일시적인 구조조정 프로그램 중단 등과 같은 자살 방지책을 내놓았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