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배경이 어떠하든 두 명의 한국 축구 레전드들이 위기에 빠진 한국 축구를 살리는데 도움을 주겠다며 협회와 손을 잡은 사실은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홍명보 전 감독을 전무이사로 영입한 것도 놀라웠지만 영국에서 축구 행정 공부를 하고 있는 박지성에게 유스전략본부장 자리를 맡긴 협회의 발 빠른 대응도 눈에 띄었다.
러시아에서 열렸던 월드컵 조 추첨식을 마치고 일시 귀국한 박지성 유스전략본부장을 12월 8일, 수원 박지성유소년축구센터 내 JS파운데이션 사무실에서 만났다.
박 본부장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1년에 한 번씩 진행하는 행사도 있다. 바로 자신의 재단인 JS파운데이션이 주최가 된 재능학생 후원금 전달식이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기 전 박 본부장은 수원 시내의 한 호텔에서 2017 재능학생 후원금 전달식을 열었다. 박지성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는 23명의 학생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그는 재능학생 후원을 축구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학업, 농구, 바둑, 빙상, 음악 분야에 까지 넓혔다. 박 본부장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축구선수였다고 해서 축구 선수만 돕고 싶지 않았다. 나도 축구를 하며 원하는 꿈을 이뤘듯이 자기 분야에서 꿈을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에게 똑같이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현역 선수로 뛰던 2012년부터 재능학생들 후원을 이어온 박 본부장은 여건이 허락한다면 이 후원 사업을 지속시키고 싶은 바람을 갖고 있다.
어느새 유니폼보다 양복이 더 어울리는 상황. 그래도 오랜만에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박 본부장의 모습에선 세월도, 나이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양복 벗고 유니폼을 입으면 그라운드로 달려 나갈 것 같은 환상과 기대가 교차했다.
영국에서 유학 중인 박지성이 나름 큰 역할을 기대하게 만드는 협회 유스전략본부장 자리를 맡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협회의 꾸준한 부탁과 제안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어렵게 승낙한 것이다. 최근 한국 축구 상황이 좋지 않았던 부분이 결심을 굳히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한국 축구가 위기에 빠졌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한국 축구의 미래인 유스 시스템의 방향을 갖추는데 동의했고 임무를 맡게 됐다.”
수원 시내의 한 호텔에서 열린 2017 재능학생 후원금 전달식 행사에 참석한 박지성 유스전략본부장. 임준선 기자
아직은 영국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았고, 축구 행정을 배우기 위해 알렉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과 맨유의 데이비드 길 전 사장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상황에서 한국의 유소년 축구를 위해 일을 한다는 건 박 본부장한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주위의 상반된 조언도 많았고 부모님, 아내, 지인들이 건네는 말에도 귀를 기울였지만 최종 결정은 한국 축구에 대한 책임감을 앞세운 박 본부장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약 다른 분야였다면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한국 축구의 근간이 되고 앞으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유소년 축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협회 제안을)받아들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협회 제안을 받아들인 후 단 한 번이라도 후회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박 본부장은 “여러 차례 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협회로부터 모든 보고를 받은 게 아니라 유스전략본부장이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했다. 분명한 건 내가 뭔가를 시작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어떤 문제가 있었다면 이전에 해결됐을 것이다. 지금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만큼 문제를 풀어내기가 어렵다는 의미도 된다. 점점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박지성이 유스전략본부장을 맡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부에선 협회의 깜짝 인사를 두고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카드’라는 지적도 있었다. 박 본부장은 이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나타냈다.
“내가 굳이 협회의 어려운 부분을 해결해주기 위해 한국의 유소년축구를 돕겠다고 나설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결과적으로 나한테 더 안 좋은 상황이 될 수도 있는데 내가 왜 협회의 방패막이가 되려 하겠나. 내가 유럽에서 배운 유소년 시스템이 있을 것이고, 그런 부분을 한국에 맞게끔 접목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기에 나한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에서, 현장에서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가장 중요한 건 유럽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협회에 전달하는 것이다. 나 보다 더 전문적인 외국인이 합류해 세부적인 부분을 챙겨야 한다. 나는 그 전문가가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녹아들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고.”
한때는 대표팀 선후배로 친분을 나눴던 홍명보 전무이사와 함께 협회 행정을 맡게 된 것과 관련해선 홍 전무이사의 경험을 내세우며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난 상근직이 아니지만 홍명보 전무이사는 상근직 아닌가. 지도자 경험도 많고 축구 행정 관련해서도 나보단 협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홍 전무이사가 내게 따로 전한 말씀은 없었지만 서로가 지금의 위기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박 본부장은 최근 대표팀과 협회를 향한 축구팬들의 날선 비판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런 비난과 비판들을 두고 축구 팬들이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표팀이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면 발생하지도 않았을 일들이다. 팬들의 비난과 비판은 선수들이, 또 협회가 받아들이고 해결해야 한다. 얼마나 꾸준히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도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비난 받는 걸 억울해 하기 보단 팬들이 왜 그런 비난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미 과거의 일이지만 앞으로 팬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다시 그런 일이 발생되지 않게 하려면 협회가 어떤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현재 대표팀에서 또 소속팀인 토트넘 홋스퍼 FC에서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는 손흥민에 대해선 남다른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흥민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좋지 못한 플레이를 선보이는 바람에 팬들의 희비가 가릴 때도 있지만 그만큼 흥민이가 팬들의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는 의미 아니겠나. 어려움이 생기면 결국은 선수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극복을 하다보면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진다. 아픔과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선수일수록 더 단단해진 몸과 마음으로 뛸 수 있다고 믿는다. 흥민이는 분명 축구 팬들의 기대에 보답할 것이고 그에 부합하는 실력을 발휘해나갈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박 본부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2014년 은퇴 후 지금까지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잘 왔다고 생각하나?”
“내가 협회 일을 맡았다는 것 자체가 계획대로 가고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협회 일은 은퇴 후의 로드맵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내가 닿고자 하는 목표까지 일직선으로, 평탄하게 가고 있진 않아도 그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는 사실에는 감사한 마음이 든다.”
선수 생활처럼 은퇴 후의 삶도 모범적으로 이끌어가는 그의 어깨가 유스전략본부장을 맡게 되면서 더 무거워졌지만 박 본부장이 이끌어 가는 한국 유소년축구의 시스템이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