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정관에는 ‘총재는 이사회에서 재적이사 4분의 3 이상의 동의를 받아 추천하며, 총회에서 재적회원 4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한 후 주무관청에 보고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KBO는 12월 11일 총회 서면결의를 통해 4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얻어 정 전 국무총리 선출을 최종 의결했다. 이어 주무관청인 문화체육관광부에 보고했다. 이로써 정운찬 신임 총재는 2018년 1월 1일부터 3년간 KBO를 이끌게 됐다.
# 왜 정운찬 총재인가
정운찬 신임 총재는 처음부터 프로야구 구단주들이 가장 강력하게 원했던 인물이다. A 구단 고위 관계자는 “예전에 10개 구단 구단주나 구단주 친인척 가운데 한 명이 총재를 맡기로 합의한 적이 있다. LG 친인척 기업(희성그룹)인 구본능 총재가 그때 뽑힌 인물”이라며 “이번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 때문에 KBO에서 각 구단주들에게 차기 총재 후보를 추천 받는 형식으로 후보자 선정이 진행됐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복수 구단 구단주가 정 전 국무총리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이사회에 모인 각 구단 사장단도 환영했다. B 구단 사장은 “정 총재는 야구를 사랑하기로 유명한 분이고 명망과 덕망을 갖추신 분이다. KBO를 이끌 차기 수장으로 충분한 자격을 갖춘 분이라고 판단해 이사회에서 추대됐다”며 “비밀 투표 결과 단 한 구단도 반대하지 않고 만장일치로 결정됐다”고 설명했다.
정운찬 신임 총재. 사진제공=KBO
충남 공주 출신인 정운찬 신임 총재는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1978년 모교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2002년 역대 최연소 서울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2009년 9월부터 2010년 8월까지는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현재는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유명한 야구팬이다. 특히 두산의 원년팬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08년 라디오 방송에서 특별 해설을 한 경험이 있고, 2013년 캐나다 로저스센터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시구도 했다. 2013년 출간한 자서전의 제목은 <야구 예찬>이다. 이 책에 따르면, 정 신임 총재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동네 형들과 야구를 하다 처음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함”을 느꼈다. 경기중 입학 선물로 야구 글러브를 받은 뒤에는 야구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야구부에 지원했다가 1년 만에 그만뒀지만, 미국 유학시절 메이저리그 경기장을 드나들고 한국 유학생 야구팀에서 투수로 뛰면서 인연을 놓지 않았다. 야구 훈련에 몰두하다 박사 학위 취득이 1년 늦어졌을 정도다. 여전히 야구장에 자주 나타난다. 두산 관계자는 “올 시즌 중에도 여러 차례 야구장을 찾아 직접 경기를 관전하셨다”고 했다.
야구 현안에도 관심이 많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KBO 총재로 물망에 올랐다. A 고위 관계자는 “유영구 총재가 선출되던 2000년대 후반부터 매번 총재 임기가 끝날 때마다 새 총재 후보로 거론되던 분”이라고 했다. 번번이 제의를 거절했지만, 이번엔 마침내 수락했다.
# 신임 총재를 향한 기대와 우려
야구계는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새 총재로 부임한다는 소식에 환영의 목소리를 냈다. 일구회,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일제히 환영과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야구계 관계자들도 마찬가지다. C 구단 단장은 “국무총리까지 지내셨고, 야구도 좋아하는 분이라 환영한다”며 “사회적으로 저명하고 존경받는 인사가 새 총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정운찬 총재가 현재 시점에서 가장 적합한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D 구단 단장도 “아무래도 신임 총재는 각종 제도나 규약 개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쁘지 않은 인물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아무래도 야구를 향한 남다른 애정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D 단장은 “워낙 야구광인 데다 두산 팬임을 대부분 알고 있지 않나”라며 “야구에 대한 관심이 없는 분이나 회원사(기업인)가 돌아가면서 총재를 맡는 것, 정치인이 KBO 총재를 한번쯤 거쳐 가는 자리로 여기는 것도 모두 반대한다”고 지지 이유를 설명했다. E 구단 사장 역시 “정운찬 신임 총재는 야구에 관심이 많고 이해도가 높으면서도 국무총리와 서울대학교 총장 경험을 통해 행정을 잘 아는 분”이라며 “여러모로 KBO를 잘 이끄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물론 ‘야구를 좋아하는’ 총재가 ‘일 잘하는’ 총재는 아니다. 최근 10년간 KBO 총재직을 거쳐 간 신상우-유영구-구본능 총재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야구광’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총재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에 대해선 판이하게 다른 평가를 받았다. 특히 구단과 선수 그리고 각 구단 간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조정과 중재를 해야 하는 ‘커미셔너’ 역할 면에서는 모두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한 메이저리그전문가는 “그동안 우리 총재에게는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와 같은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웠다”며 “환경 자체가 달랐고, 총재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분명했다. 오히려 사무총장이 더 행정 전면에 나서는 분위기였다”고 지적했다.
KBO 리그는 2011년 8월 구본능 총재가 부임한 뒤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뤘다. 10개 구단 체제가 됐고, 800만 관중 시대가 열렸다. 최초로 돔구장도 보유하게 됐다. 하지만 산업적인 면에서는 아직 커져 버린 규모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심판 금품수수 사건, 승부 조작, 음주운전 등 비도덕적인 사건들도 끊임없이 발생했다. 새로 KBO의 수장에 오르게 될 정운찬 추천자의 어깨가 무겁다.
C 단장은 “정계와 재계로 모두 발이 넓은 정운찬 추천자가 진정한 ‘커미셔너’로서 사태를 잘 해결하고 갈등을 중재해 나가기를 기대하고 있다”며 “그 과정에서 일이 원활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이사회(10개 구단 사장)나 실행위원회(10개 구단 단장)도 협조하는 역할을 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총재의 오른팔 역할을 하게 될 사무총장의 역할도 중요하다. C 단장은 “유능한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이사회와 실행위원회가 현안을 잘 짜고 총재와 함께 해결해 나가야 야구계가 잘 돌아갈 것 같다”고 내다봤다.
# 총재의 역할은 무엇인가
KBO 리그에서 총재의 권한은 막강하고 절대적이다. 야구 규약에는 총재의 직무에 대해 공식적으로 ‘KBO를 대표하고 이를 관리 및 통할한다’고 명시돼 있다. 프로야구에 가입된 회원(구단)에 대해 회원자격, 연고지역, 선수계약의 보유, 경기 참가에 관한 제반 권리의 박탈 또는 정지, 구단에 대한 제재금 부과, 경고처분 등을 결정할 수 있다. 또 선수와 구단 직원들을 비롯한 개인에 대해서는 실격처분이나 직무정지, 참가활동정지, 제재금 부과, 경고처분 등을 심리한다. 총재의 지시, 재정, 재결은 최종적인 형태로 모든 리그 관계자에게 적용된다. 회원 및 회원 소속 리그 관계자들은 무조건 총재의 결정대로 이행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또 KBO 규약과 제반 규정, 이 조항들을 따르는 데 필요한 절차에 대해 이견이나 분쟁이 있을 때는 총재가 최종적인 유권 해석을 할 수 있다.
KBO 총재는 전통적으로 ‘명예직’이었다. 많은 총재가 무보수로 일했다. 총재의 연봉은 KBO 예산에 편성되지 않는다. 두산그룹 회장이었던 고 박용오 총재 시절부터 돈을 받지 않았다가 후임 신상우 총재 때 연봉 1억 8000만 원과 업무추진비 1000만 원이 지급됐다. 그러나 명지학원 이사장이었던 후임 유영구 총재 때 다시 무보수로 돌아갔고, 구본능 총재도 임기 내내 무보수로 일했다. 기업인이 아닌 정운찬 신임 총재가 임금을 받게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반면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인 롭 맨프레드는 스타플레이어들에 맞먹는 연봉 2500만 달러를 받는다. 전 세계 프로스포츠 가운데 최고 연봉 커미셔너로 추정되는 인물은 미국프로풋볼(NFL)의 로저 구델. 2013년 연봉이 무려 3500만 달러에 달했고, 2014년부터는 연봉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역대 두 번째 오래 재임한 구본능 총재. 사진제공=KBO
# 어떤 인물들이 거쳐갔나
정운찬 총재 이전에 많은 인물이 KBO 총재 자리를 거쳐 갔다. 프로야구 제1~2대 총재인 고(故) 서종철 총재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였다. 이런 배경 덕분에 정치적 평가와는 별개로 초창기 프로야구 인프라를 다지는 데 큰 공을 세운 게 사실이다. 이후에도 문화공보부 장관 출신 이웅희 총재, 국방부 장관 출신 이상훈 총재를 비롯해 정치와 관련 깊은 인물이 주로 총재를 맡았지만 대부분 KBO 총재직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심지어 6대 오명 총재는 부임 26일 만에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사퇴했고, 7대 권영해 총재도 부임 278일 만에 안기부장 자리를 꿰차고 물러났다. 8대 김기춘 총재도 487일간 머물다 국회로 진출하면서 야구계를 떠났다. 사회 문제에 책임을 지거나 개인 비리 문제가 불거지면서 중도 사퇴한 총재도 적지 않았다. 야구계가 ‘정치적으로 힘이 센 총재’보다 프로스포츠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인물을 원하기 시작한 이유다.
고(故)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과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은 그런 의미에서 여러 모로 기억할 만한 총재였다. 박 전 총재는 사상 처음으로 구단주 회의에서 직접 선출한 민선 총재였고, 역대 최장수 연임 총재였다. 1998년 12월 8일부터 2005년 12월 11일까지 12~14대 총재를 역임하면서 무려 2561일 동안 KBO를 이끌었다. 프로야구 정규시즌 타이틀 스폰서를 처음으로 유치해 KBO가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프리에이전트(FA) 제도 도입, 경찰청 야구단 창단, 도시 연고제 정착 등을 성공시켜 KBO 리그 운영의 틀을 마련했다.
구본능 총재는 2011년 8월 제19대 총재로 추대돼 유영구 전임 총재의 잔여 임기를 모두 채웠고, 그해 12월 20대 총재로 재추대됐다. 2014년 12월에는 만장일치로 다시 21대 총재를 맡게 됐다. 올해 12월 31일까지 총 2324일간 KBO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박 전 총재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오래 재임한 총재로 남게 됐다. 구 총재 역시 관중 800만 돌파를 비롯해 가시적인 성과가 많다. 제9구단 NC와 제10구단 kt의 창단을 차례로 이끌어 내면서 10개 구단 체제를 확립했고, 광주와 대구를 비롯한 야구장 신축과 리모델링을 유도했다. 구 총재 재임 기간 동안 전국 야구장 수는 세 배 가까이 늘었다. 한국 프로야구의 르네상스를 함께 한 총재로 기억될 만하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가토 료조 커미셔너의 씁쓸한 퇴장…통일구 반발력 은폐로 ‘아웃’ 가토 료조는 일본야구기구 역대 커미셔너 가운데 한국 야구계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2000년대 초반 주미 대사를 맡아 명성을 쌓았고, 2008년 7월 일본야구기구 커미셔너로 취임했다. 그는 외교관이 되기 전부터 야구를 좋아한 인물로 유명했다. 주미 대사 시절 오 사다하루와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회담 자리를 마련했을 정도로 ‘야구 외교’도 펼쳤다. 미국의 홈런왕 행크 애런을 일본 대사관저에 초청해 파티를 열기도 했다. 결국 일본 프로야구를 총괄하는 기구의 수장 자리까리 올랐다. 다만 정작 그가 유명세를 탄 것은 ‘통일구 반발력 은폐 논란’ 탓이다. 그는 2009년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 일본의 우승으로 끝난 뒤 “일본 대표팀의 대회 3연패를 위해 일본 프로야구 공인구를 메이저리그 공인구로 통일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일본야구기구는 가토의 주도 아래 2011시즌부터 통일구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당시 “앞으로 국제 대회에서도 일본 선수들이 친숙한 공으로 경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1시즌 종료 후 ‘통일구 도입 이후 홈런 수가 너무 적어졌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가토는 “통일구에 잘 대응해야 최고 중의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말로 오히려 타자들의 분발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단이 났다. 일본야구기구는 결국 2013시즌을 앞두고 홈런 수를 늘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타고투저’를 유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통일구 반발 계수를 높였다. 문제는 이 변경 사항을 12개 구단에 알리지 않고 은폐했다는 점이다. 제조업체인 미즈노사가 “각 구단에 공표하자”고 권유했지만, 일본야구기구가 듣지 않았다. 그해 6월 이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일본 야구계가 발칵 뒤집혔다. 각 구단이 커미셔너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가토는 “기사가 나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고 발뺌했다. 책임을 묻는 기자에게 “그렇게 큰 불상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발언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그 점이 오히려 더 공분을 샀다. 게다가 가토가 실제로는 공인구 수시 검사 보고를 줄곧 받아왔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가토는 결국 통일구 변경 경위에 대한 최종 보고서 제출일을 하루 앞두고 사임했다. 논란이 수면 위로 올라온 지 3개월 만이다. 일본 프로야구가 가장 많은 기대를 안겼던 장수 커미셔너는 그렇게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퇴장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