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7일 오전 엔씨소프트 윤송이 사장 부친 살해 용의자가 경기도 양평군 양평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허 씨는 지난 10월 25일 오후 8시쯤, 양평군 서종면에 위치한 윤 씨의 자택 주차장에서 윤 씨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한 뒤 지갑과 휴대전화를 강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범행 후 윤 씨의 벤츠 차량을 인근에 버리고 본인의 차량으로 달아난 허 씨는 하루 뒤인 26일 오후 5시45분께 전북 임실군에서 붙잡혔다.
체포 직후 분위기는 좋았다. 체포된 허 씨의 옷과 신발, 차량 등에 묻어있던 피 성분에서 숨진 윤 씨의 DNA가 확인되는 등 살해 정황과 증거가 속속 드러났다. 실제 검거 직후 허 씨는 자신이 윤 씨를 살해한 혐의를 인정했다. “우발적으로 살해했다, 내가 내 정신이 아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확히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허 씨는 진술을 바꿨다. “내가 죽이지 않았다”며 구체적인 얘기를 전혀 하지 않기 시작한 것. 그리고 범행 동기로 ‘금융권 채무에 따른 강도 살인‘ 가능성을 묻는 경찰의 질문에 “빚 중 상당 부분은 내 몫이 아니다, 어머니랑 함께 빌린 부분이 있고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답변해 ‘동기’마저 부정했다. 경찰이 ’프로파일러‘까지 투입했지만, 허 씨는 진술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반면 경찰과 검찰은 범행을 저지른 허 씨가 ‘잘못된 전략’을 짰다고 보고 있다. ‘핵심 범행 증거’가 없으면 재판에서 다퉈볼 만하다고 허 씨가 판단, 잠시 범행을 인정했다가 부인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다는 분석이다.
10월 26일 엔시소프트 윤송이 사장의 부친이자 김택진 대표의 장인으로 알려진 윤 아무개 씨(68)가 경기도 양평 자택 정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일요신문DB
수사에 참여한 관계자는 “허 씨가 윤 씨를 찌르는 장면이 찍힌 벤츠 차량의 블랙박스를 제거한 뒤 이를 도주 과정에서 버렸는데 어디에다가 버렸는지 절대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허 씨는 본인이 범행에 사용한 칼도 버렸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칼을 하나 발견했지만 윤 씨의 혈흔이 발견되지 않아 이번 사건의 흉기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때문에 허 씨가 윤 씨 집 앞에서 움직인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자료가 있지만 실제 범행을 입증할 흉기를 찌르는 장면이 담긴 CCTV와 범행에 사용한 흉기가 없는 상황. 앞선 관계자는 “스스로 핵심 증거를 제거했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무죄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허 씨의 범죄를 입증할 ‘제반 증거’를 다수 확보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만으로도 유죄 입증을 할 수 있다는 것. 경찰은 체포 당시 허 씨의 옷 등에 묻어 있던 윤 씨의 DNA 외에도, 허 씨가 사전에 강도를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점을 찾아냈다. 허 씨의 휴대전화를 분석한 결과 허 씨가 범행에 앞서 수갑·가스총·핸드폰 추적·고급 빌라 등을 검색한 흔적을 발견된 것. 또 허 씨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복원해, 범행 일주일 전 용인지역 고급 주택가를 둘러본 사실도 밝혀냈다.
허 씨는 ‘금전적으로 압박받지 않았다’고 얘기했지만, 허 씨의 진술을 반박할 만한 자료들도 확보했다. 부동산 관련 일을 해왔지만 경제적 수입이 불규칙했던 것. 허 씨의 채무는 8000만 원 수준이었는데, 모두 카드사나 대부업체와 같은 제2금융권에서 빌린 것이었다. 매달 수백만 원에 달하는 이자를 갚아야 했는데, 최근에는 이를 갚지 못해 금융권의 채무 독촉이 이어졌던 사실도 찾아냈다. 경찰 수사 결과 실제 허 씨는 지난 9월부터 대출업체로부터 200여 통의 빚 독촉 문자메시지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앞선 수사기관 관계자는 “허 씨가 아무리 범행을 부인해도, 허 씨가 현장을 찾았던 CCTV, 허 씨가 윤 씨의 차량을 가지고 이동해서 본인의 차량을 갈아타는 CCTV 등 칼로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만 없을 뿐 그 앞뒤를 설명할 모든 자료가 있다”며 “허 씨의 범행 입증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허 씨가 잘못된 재판 전략을 세운 것 같다”고 지적했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
1심에서 다퉈보고 2심에서 인정하는 게 유리? ‘피고인이 범행을 모두 자백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있기 때문에 형을 감형합니다.’ 형사 사건 선고일날 법원을 찾으면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피고인이 ‘감형’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유리한 방법이 ‘범행 자백’과 ‘뉘우침’이기 때문. 뉘우침이 담긴 ’반성문‘을 얼마만큼 잘 썼는지도 감형에 중요하다. 하지만 판사들도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판사들 사이에서는 재판정에 들어올 때는 90도로 인사하던 피고인들이 중형이 선고된 뒤에도 재판부에 인사를 그대로 하는지, 아니면 하지 않고 나가는지를 보면 진짜 범행을 뉘우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자백‘과 ’반성문‘은 피고인은 물론, 변호인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감형 카드다. 단, ’다퉈볼 만하다‘ 싶은 사건은 1심에서부터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핵심 증거나 법리적으로 다퉈볼 부분이 있으면 최대한 다퉈본다. 그리고 1심 결과를 바탕으로 2심에서부터 ‘자백’과 ‘뉘우침’의 전략을 쓰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것.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통상 단순한 형사 사건의 경우, 1심에서 뉘우치나 2심에서 뉘우치나 감형 폭은 크게 차이가 없다”며 “1심에서 다퉈볼 부분에 대해서는 다퉈본 뒤 법원 판단을 받았을 때 예상대로 유죄가 나올 경우, 2심에서부터 뉘우치고 피해자 측과 합의를 시도해도 재판부가 감형해주는 정도는 비슷하다“고 풀이했다. 핵심 증거를 폐기한 허 씨도 같은 맥락으로 재판 전략을 세웠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이유다. 수사기관 관계자 역시 “우리가 어디까지 증거를 확보했는지 알아챈 허 씨가 1심에서는 다퉈볼 만하다고 판단해 범행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 같다”며 “1심에서 중형이 선고되면 태도가 바뀌어 입을 열지 않겠느냐”고 귀띔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