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시즌인 요즘 금융권의 고위 임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최종구 금융위원장의 입을 쳐다보고 있다. 금융정책 컨트롤타워인 최 위원장이 연일 금융권 최고경영자(CEO)들의 거취에 대해 높은 수위의 발언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최 위원장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민간 금융사 최고 경영자 선임에 문제가 있다”고 노골적으로 지적했다. 그는 “민간회사 인사에 개입할 의사도 없고 여태껏 그래오지도 않았다”면서도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최고 경영진이 결정되는 데는 분명 문제제기하고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금융당국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주주가 없다보니 너무 현직이 자기가 계속할 수 있게 여러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하성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고려대 경영학과 74학번인 장 실장은 현 정부에서 고려대 출신 인사들이 약진하는 배경이 된다는 얘기가 나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사실상 관치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나오는데도 거침없이 이어진 그의 발언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 금융권의 시각이다. 금융업계 고위 인사들은 “최 원장이 손과 발이라면 머리는 장하성 실장과 김승유 전 하나학원 이사장”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들이 요즘 금융권을 들었다놨다 하는 실세라는 이야기다. 이들은 고려대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다. 김승유 전 하나학원 이사장이 경영학과 61학번으로 가장 선배고,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경영학과 74학번으로 직속후배며, 무역학과 76학번인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막내에 해당한다.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진행되는 일련의 금융권 인사에서 이 3인방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맏형인 김승유 전 이사장이 정·관계 내의 고려대 인맥을 총동원해 금융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말이 오가고 있다.
고려대 금융인맥의 좌장 격인 김승유 전 이사장은 2005년 12월부터 2012년 초까지 하나금융지주 회장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 시절 4대 천왕으로 불릴 정도로 MB 최측근으로 알려졌다. MB정권 시절 금융권 ‘4대 천왕’으로 통했던 김 전 이사장은 최근 한국투자금융지주 고문으로 위촉되면서 금융권에 재등장했다.
사실 고려대 출신들은 박근혜 정부 시절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주로 외부로 떠돌았다. 서강대 출신인 박 전 대통령의 동문들인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회)’와 ‘라이벌’ 연세대를 나온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금융당국에서는 고려대 출신 고위직들이 내부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정완규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은 새누리당 수석전문위원을 다녀온 뒤 올 3월 다시 FIU로 나가 있는 상태다. 권대영 전 금융정책과장은 한국금융연구원으로 파견을 갔고, 선욱 전 공정시장과장은 민간근무휴직제를 통해 IBK투자증권에서 근무한 뒤 최근에야 금융위로 복귀했다. 민간금융사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금회가 득세하면서 고려대 출신 금융사 CEO는 눈에 띄게 줄었고, 임원들도 한직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3인방’이 실세로 떠오르면서 고려대 출신들은 권토중래의 시대를 맞고 있다. 우선 안동현 자본시장연구원장(경영학과), 정지석 코스콤 사장(경영학과)이 고려대 출신이다.
고려대 출신들은 최근 주요 금융권 이슈의 중심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융투자협회 회장 선출이다. 황영기 회장의 강력한 연임 의지를 금융당국이 단박에 무너뜨리자 고려대 출신들이 기다렸다는 듯 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려대 무역학과 76학번인 최종구 금융위원장 역시 금융권 고려대 인맥의 핵심으로 평가된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금융권에 따르면 차기 금투협 회장으로는 고려대 출신인 황성호 전 우리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 사장과 김봉수 전 한국거래소 이사장, 장승철 전 하나금융투자 사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경영권 분쟁이 발생한 KTB투자증권에서는 일종의 ‘고연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도 나온다. 권성문 KTB증권 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지난 4일 긴급 이사회를 소집한 임주재 사외이사(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는 권 회장의 연세대 경영학과 선배다. 두 사람은 ‘연세대금융인회(연금회)’에 속해 끈끈한 유대관계를 이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또 권 회장 추천 사외이사 중 내년 3월 임기가 만료돼 또 다른 경영권 분쟁의 ‘불씨’가 될 것으로 여겨지는 이훈규 사외이사(차의과학대학교 총장)도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반면 권 회장에 맞서고 있는 인물로 알려진 이병철 부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중퇴했다. 이 부회장은 김승유 전 이사장이 하나금융 회장으로 있던 2010년 다올부동산신탁을 인수하면서 하나금융에 합류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KTB투자증권 부회장으로 입사하면서 김승유 전 이사장을 영입하려 했지만 권성문 회장의 반대에 부딪혀 불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권 회장에 대한 비위 제보가 끊이지 않았고, 권 회장 측은 김승유 전 이사장과 이 부회장을 배후로 의심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금융권에는 고려대 출신 인사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특히 정부의 입김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금융사들은 지난 정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살아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한금융은 회장을 비롯한 주요 계열사 수장이 고려대 출신들로 채워져 이목을 끈다.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은 고려대 무역학과를 졸업했으며 위성호 신한은행장은 고려대 경제학과, 임영진 신한카드 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보험업계에서는 김창수 삼성생명 사장(고려대 경영학과), 차남규 한화생명 부회장(고려대 법학과), 이성택 동부생명 사장(고려대 경영학과), 이철영 현대해상 회장(고려대 경영학과)이 고려대 출신이다.
증권업계에서는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교육학과, 경영학 복수전공),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경영학과), 유창수 유진투자증권 부회장(사회학과), 이병철 KTB투자증권 부회장(경영학과 중퇴), 최석종 KTB투자증권 사장(정치외교학과), 신요환 신영증권 사장(경영학과) 등이 고려대를 나왔다.
고려대 약진 현상을 바라보는 금융권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특히 청와대와 금융당국, 올드보이까지 합세해 민간금융사를 압박하는 모습은 적폐청산을 외치는 현 정부의 기조와도 맞지 않다는 비판이 높다.
대형 민간금융사 한 고위 관계자는 “정부 핵심 인사와 금융당국이 민간 금융사 인사에 개입했다면, 특히 특정 학맥이 작동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지난 정부에서 금융사들이 르완다보다 못하다는 원색적인 비난이 나왔는데, 이런 행태야말로 후진국보다 못한 악습”이라고 꼬집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