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즈키 이치로(윗 사진)와 지난 12월 에인절스로 이적한 마쓰이 히데키. 연합뉴스 | ||
빨간 모자와 55번이라는 등번호가 달린 새로운 유니폼의 마쓰이를 찍으려는 취재진은 양키스 때와 비교하면 크게 줄었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고질라’로 통하는 그의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50여 명이 넘는 취재진들이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비슷한 시각 일본 가나가와에 위치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실내 연습장에도 50여 명의 취재진이 모여 있었다. 일본 야구계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선수인 스즈키 이치로(36)가 자유연습을 하는 광경을 찍기 위해서였다.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오릭스 버팔로스)의 간판스타였던 이치로가 굳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연습장을 쓰게 된 것은 CF 촬영 등으로 12월 중순부터는 도쿄에 스케줄이 잡혀있어 직접 도쿄에서 가까운 가나가와에 연습장이 있는 자이언츠에 신청을 했다고 한다.
일본 언론이 이치로의 연습 장면을 찍기 위해 대거 몰린 이유는 이 장면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일류 콤플렉스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이치로가 일류의 길만 걸어온 마쓰이의 친정구단에서 훈련을 한 것. 이날 취재진들이 이치로에게 마쓰이의 이적에 관해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그는 “웰컴 투 웨스트 디비전(서부지구에 온 것을 환영한다)”이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이치로의 짧은 코멘트에 대해 일본 언론에서는 그와 마쓰이 간의 미묘한 거리감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고 표현했다.
이미 야구선수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이치로가 단 한 가지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일본야구계에서 특히 중요시되는 ‘명문’이라는 브랜드였다. 자이언츠는 일본 제일의 명문팀이다. 입단만 하면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대우와 환경에서 야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언론의 태도부터가 다르다. 그런 자이언츠에서 4번타자로 활약한 선수가 바로 마쓰이였다.
이치로와 마쓰이. 인기와 실력에서 정점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사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그다지 친밀하지는 않다. 둘 다 미국에서 활약 중인데도 서로 간에 아무런 교류 없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요 몇 년간은 부상의 연속이었던 마쓰이에 비해 시즌 최다안타 등 계속해서 메이저리그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이치로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그럼에도 일본 내에서 마쓰이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2009년 이치로가 9년 연속 200안타를 달성했지만 마쓰이의 월드시리즈 MVP 소식으로 그의 기록은 다시 한 번 마쓰이의 그림자 뒤에 묻히고 말았다.
그렇게 된 데는 언론의 대우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일본의 한 스포츠 저널리스트는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야구선수로서 자라온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마쓰이는 세이료고등학교 시절부터 최고의 주가를 올려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93년 프로에 데뷔한 뒤로는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73)의 수제자로 이른바 ‘영재교육’을 받아 일본을 대표하는 홈런왕이 된다. 그에 비해 이치로는 드래프트 4위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입단한다. 1992년 프로 데뷔 후 2군 생활을 계속해오던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4년 퍼시픽리그 최우수선수로 뽑히면서부터였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이치로의 명문구단 콤플렉스는 계속됐다. 그도 그럴 것이 타율이나 타점이 이치로가 우수해도 스포츠신문 1면을 장식하는 것은 언제나 마쓰이였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진출에서도 이치로가 신흥구단이었던 시애틀 매리너스로 이적한 반면, 마쓰이는 미국의 최고 명문구단인 뉴욕 양키스와 계약하게 된다. 그런 그 둘의 심정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각자가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한 뒤였던 2004년 1월에 방영된 TBS의 대담에서였다. 마쓰이는 “나는 자이언츠에 남았더라도 괜찮은 야구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반면, 이치로는 “나는 우선 일본에서 경기를 하는 게 괴로웠다”며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런 그 둘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었다. 이치로는 WBC에서 대활약해 국민 스포츠 선수로 자리매김한다. 그에 비해 일본에서 호감도 넘버원이었던 마쓰이는 대회 출전을 포기함으로써 야구인생 처음으로 팬들로부터 야유를 받게 되었다.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는 재계약을 앞두고 양키스가 WBC 참가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컸지만 또 다른 이유로 이치로가 보낸 메시지 때문이었다는 말들도 있다. 그 메시지에는 ‘이 대회가 세계 제일을 정하는 것인지에 대해 불투명한 부분도 많고, 간단하게 참가를 결정하지 않는 편이 좋다. 출장할지 안할지에 대해서는 둘이 조정해서 정하자’고 쓰여 있었다. 마쓰이는 인터뷰에서 “모든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때의 상황을 고려해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생긴 거리감이 이치로가 WBC 중간에 내뱉은 발언 때문이라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제1회 대회 쿠바와의 결승전 전날 밤, 이치로는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녀석들을 후회하게 만들자”며 소리쳤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쓰이는 그 이후부터 매리너스와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야구계의 후배로서 선배인 이치로에게 인사를 하던 것을 그만뒀다.
올 시즌부터는 마쓰이의 서부지구 이적으로 인해 두 사람이 대결을 펼치는 것을 더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마쓰이는 “지금까지 훈련해 온 것을 에인절스의 우승을 위해 전부 끄집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요 몇 년간 팀의 우승보다 자신의 기록에만 집착했다고 비판받아온 이치로에게 내민 도전장으로도 들린다.
김지혜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