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영웅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스타들의 세레머니. 고성준 기자
[일요신문]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12월은 야구나 축구 등 야외에서 즐기는 스포츠가 휴식기를 가지는 시기입니다. 지난 한 시즌을 마친 선수들은 가족,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등 휴식을 취합니다. 미래를 약속한 배우자와 미뤄뒀던 결혼식을 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15년째 12월에만 열리는 축구 경기가 있습니다. 유명 스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경기를 치릅니다. 이는 매년 연말 대표 이벤트로 자리 잡은 ‘홍명보 자선 축구’입니다. 15년째 지속된 이번 대회의 테마는 ‘잊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 축구영웅들’이었습니다. 김용식, 김화집, 홍덕영, 한홍기, 정남식, 최정민 등 한국 축구 기틀을 마련한 6인의 축구 원로를 기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홍명보 자선축구는 한국 축구에 새로운 문화를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이벤트입니다. 이 대회를 전후로 매년 겨울 다양한 축구 선수 모임이 자선 경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희대 출신 선수가 주축이 된 봉사단체 ‘미소’, 인천 유나이티드 전현직 선수 모임 ‘아미띠에’ 등 다양한 모임이 기부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경기를 즐기는 스타들. 고성준 기자
<일요신문i>는 지난 19일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홍명보 자선축구대회를 찾았습니다. 이근호, 구자철, 이재성 등 남자선수 외에도 이민아, 심서연, 서현숙 등 여자 선수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구 스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사랑, 희망, 하나 3개 팀으로 나뉘어져 풀리그를 치른 이번 경기는 지동원, 정우영, 고요한, 장현수, 조현우 등이 팀을 이룬 하나팀의 우승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하지만 승패와 관계없이 참가선수 모두와 지켜보는 팬들도 미소를 띠는 하루가 됐습니다. <일요신문i>는 이날 경기의 흥미요소 포인트 세 가지를 꼽아봤습니다.
# ‘잊혀졌던’ 박주호의 웃음
경기가 열리기 이전부터 화제가 된 선수가 있었습니다. 국가대표 출신 멀티 플레이어 박주호가 지난 18일 울산 현대로 이적을 확정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프로 데뷔 10년 만에 국내 무대에 데뷔하게 됐습니다.
경기전날 울산으로의 이적을 확정지은 박주호. 사진=울산 현대 축구단
하지만 그의 행복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세계적 수준의 선수들에 밀리며 전력 외로 분류돼 벤치에도 앉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이에 더해 소속팀 경기에 뛰지 못하고 있음에도 오랜 기간 이적이 이뤄지지 않아 팬들의 마음을 애타게 하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레 국가대표팀에서도 멀어졌습니다. 일부에선 그를 두고 “선수가 경기에 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가”라며 질타를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박주호를 향한 뜨거운 취재 열기
그런 그가 이적 소식과 함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소속팀 문제가 해결된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이날 경기에 임했습니다. 함께 뛰는 어린 선수의 위치를 잡아주기도 하고 상대 수비를 앞두고 돌파를 하는 등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를 팬들도 반가워했습니다. 박주호는 경기가 끝난 이후 믹스트존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받는 선수였습니다. 박주호도 “K리그를 통해 팬들에게 나를 더 가까이에서 보여드리고 싶다. 나에게도 새로운 동기부여가 생긴다”는 말로 포부를 밝혔습니다.
이날 가장 큰 환호를 이끌어낸 이민아. 고성준 기자
지난 16일 마무리된 2017 EAFF E-1 챔피언십의 화두는 대한민국의 우승이었습니다. 대표팀은 이 대회 최종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4-1 대승을 거두며 우승컵을 차지했습니다. 최우수선수상(MVP), 득점왕, 수비상, 골키퍼상 등 개인상도 대한민국이 ‘싹쓸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반쪽짜리 행복이었습니다. 여자대표팀은 중국, 일본, 북한을 상대로 3패에 그쳤습니다.
여자 대표팀이 뼈아픈 패배를 당하는 와중에도 여자축구계 스타로 떠오른 이민아는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이민아의 이름이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홍명보 자선경기는 이 같은 이민아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은 이민아의 몸짓 하나하나에 집중했습니다. 그가 공을 잡을 때마다, 경기장 전광판에 그의 얼굴이 비칠 때마다 큰 환호가 나왔습니다. 이민아는 지압 슬리퍼를 신고 달리는 릴레이 경주 이벤트에서도 경쟁자 심서연의 슬리퍼를 집어 던지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 알베르토의 축구실력
최근 방송가에서는 외국인 방송인들이 맹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알베르토 몬디의 활약이 돋보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알베르토는 축구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방송에서 아들에게 이탈리아 명문 축구팀 유벤투스 FC의 유니폼을 입히기도 했고 한 포털 사이트에서는 매주 축구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21세까지 지역 축구 클럽에 소속돼 뛰었던 이력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레 그의 축구실력에 대한 팬들의 기대치도 한껏 높아져 있었습니다. 이번 경기 그의 발끝에 많은 시선이 몰렸습니다. 하나팀의 일원으로 경기에 참가한 그는 다소 친근한(?) 플레이로 팬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오히려 수년째 이 행사에 참가한 방송인 서경석이 더 팀에 녹아드는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찬스를 놓치고 아쉬워하는 알베르토. 고성준 기자
하지만 알베르토는 그간의 아쉬움을 만회할 기회를 맞았습니다. 마지막 경기 후반 막판 영건 정우영의 패스를 받아 결정적인 골 기회를 잡았습니다. 이를 놓치지 않고 골로 연결, 활짝 웃으며 동료들과 손을 마주쳤습니다.
경기를 마치고 경기장을 나서는 알베르토는 여전히 만족스런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경기에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 뛰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기쁘다”며 소감을 밝혔습니다. 자신의 축구 실력에 대해서는 “내가 여기서 서경석 형님 다음으로 나이가 많다.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 힘들다(웃음). 그래도 한 골 넣어서 다행이다”라며 웃었습니다.
# 야구장과 ‘어르신 격려’는 글쎄…
뜻 깊은 행사였지만 아쉬운 부분도 존재했습니다. 홍명보 자선축구경기는 이례적으로 야구장에서 열렸습니다. 야구장과 특히 돔구장에 가보지 못한 축구팬에게는 이색적인 경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중석과 외야에 설치된 경기장의 거리가 먼 탓에 선수와 관중이 호흡하는 면에서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과거 실내 체육관에서 행사를 치를 때보다 관중들을 집중시키는 면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본격적인 경기 시작 전 ‘어르신’들의 격려도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선수 입장과 이번 대회 테마를 알리는 ‘축구영웅’을 소개하는 영상이 나올 때까지는 긴장이 고조됐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김정남 OB 축구회장, 이회택 전 축구협회 부회장, 홍명보 전무이사 등이 경기장에서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광판에는 이들의 이름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경기장에 나선 대회 고위 관계자들. 고성준 기자
팬들은 즉각적인 경기를 기대했지만 이들의 악수로 흐름이 끊어졌습니다. 특히 올해를 뜨겁게 달군 ‘축구협회 공금 유용’과 연관돼 있는 인사들도 이에 포함돼 있었습니다. 조중연 전 축구협회장은 전광판에 이름이 올라와 있었지만 경기장에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경기 중 관중석에서 카메라에 잡힌 홍명보 전무이사의 옆자리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팬들을 위해 치르는 이벤트에서 굳이 선수들을 향한 ‘VIP의 격려’가 필요했는지 생각해볼만한 장면이었습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