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도리가 없다. KBO 리그 10개 구단은 매년 새로운 식구를 맞아들인다. 신인 선수들이 저마다 꿈에 그리던 프로 생활을 준비하는 동안 일부 선수들은 서서히 정든 유니폼과 작별할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매년 각 구단의 보류(등록)선수는 구단 별로 65명을 넘지 않는 게 원칙이라서다. 등록할 수 있는 인원의 수는 정해져 있는데 새로운 선수들이 입단한다면, 누군가 그 수만큼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는 의미다.
# 정성훈의 방출과 후폭풍
시즌이 끝난 뒤 각 구단이 KBO에 보류선수 명단을 제출하는 시점에 ‘계약 해지’ 선수 명단이 공개된다. 그 어떤 구단으로도 옮길 수 있으니 좋게 말하면 ‘자유의 몸’이지만 실상은 더 이상 우리 팀에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의 ‘방출’이다.
올해도 그런 선수가 나왔다. LG에서 뛰던 베테랑 내야수 정성훈이 방출됐다. 올 시즌 115경기에서 타율 0.312 6홈런 30타점을 기록한 선수다. LG와 두 차례 프리에이전트(FA) 계약을 하면서 9년간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공교롭게도 LG는 최근 수년간 베테랑 선수들을 여럿 은퇴시키거나 다른 팀으로 보냈다. 팀 전반적으로 ‘세대교체’ 기조를 확고히 했다. 올해 주전 자리를 내려놓은 정성훈도 ‘팀 방향성’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팀을 떠나게 됐다.
9년간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정성훈의 전성기 시절 모습.
LG 팬들의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잠실구장 앞에서 시위까지 했다. 정성훈도 갈 곳을 잃었다. 한때 리그 정상급 3루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1루수로 전환한 지금은 타 구단에도 경쟁력 있는 선수들이 즐비하다. 30대 후반으로 접어든 정성훈으로선 여러 모로 어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눈앞으로 다가온 기록도 아쉽다. 정성훈은 올 시즌 115경기 출장을 추가하면서 양준혁이 보유한 KBO 리그 통산 최다 출장 기록(2135경기)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제 단 한 경기만 더 나서면 단독으로 최다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의미 있는 역사를 눈앞에 두고 소속팀에서 버림 받았다.
# 방출된 선수들의 불안한 겨울
한편으로는 정성훈처럼 ‘방출’로 관심을 받는 것 자체를 부러워하는 베테랑들도 많다. 은퇴 후 구단에서 원정 전력분석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A 관계자는 “내가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돼 은퇴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도 많다”며 “전력분석을 하러 간 다른 팀 구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야구 관계자가 ‘왜 여기서 사복을 입고 있느냐. 소속팀 경기 없느냐’고 물은 적도 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나이가 꽉 찼는데 아직 보여준 게 별로 없는 선수들은 매년 보류선수 명단 제출 시기가 올 때마다 불안해한다. 오랜 기간 유망주로만 지내다 어렵게 주전으로 자리 잡은 B 투수는 “시즌이 끝난 뒤부터 보류 선수 명단이 발표되기 전까지 한 달 정도는 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 마음이 불안정했다”며 “친구들을 만나도 신세한탄만 하게 되고 운동을 해도 목적이 확실하지 않으니 집중이 잘 안 됐다”고 털어 놓았다.
선수 스스로 ‘나갈’ 시기가 왔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포지션에서 어떤 유형의 신인들이 뽑혔는지 명단만 봐도 자신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다. 국가대표급 기량을 자랑했던 베테랑 C 선수는 “사실 선수 한 명이 은퇴할 때는 그 선수를 ‘은퇴하게 만드는’ 후배 한 명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딱 보면 ‘아, 저 친구가 나를 은퇴시키겠구나’하고 짐작할 수 있다”며 “어떤 신인 선수 한 명을 보고 나 역시 서서히 뒤로 물러설 때가 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털어 놓았다.
어차피 1군에서 뛸 수 있는 선수 수는 정해져 있다. 한때 화려한 스타플레이어로 군림했다 하더라도 소속팀에서 더 이상 자리가 없다고 판단하면 먼저 방출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밖으로 나와서 이적을 노릴 수 있는 선수들 역시 지극히 한정적이다. 대부분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해야 한다. 가장 좋은 케이스는 소속팀에서 프로야구 코치로 남는 것, 그 다음이 구단 프런트로 변신해 일단 다른 분야의 경험을 쌓는 것이다. 그동안 팀 성적에 공헌을 많이 했던 선수들에게 구단이 해줄 수 있는 배려다. 선수들 역시 현역 연장과 안정적인 은퇴의 갈림길에서 고민해야 한다.
또 대학이나 고교에서 지도자 자리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행운이다. 다만 이런 기회 역시 야구를 어느 정도 잘했던 소수의 선수들에게만 열려 있다. 대부분의 무명 선수는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로 녹록지 않은 현실과 맞닥뜨린다. 야구와 관련한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그것도 아니면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다른 길을 열어야 한다. 그래서 겨울이 더 추워진다.
# 베테랑 FA들 수난시대
방출 선수만 힘든 것도 아니다. 30대 중후반에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은 박탈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FA 대어’라 불리는 일부 스타플레이어들 몸값이 80억 원, 90억 원을 넘어 100억 원까지 훌쩍 넘기는 시대다. 눈치작전이나 줄다리기도 필요 없고 ‘부르는 게 값’이다.
일사천리로 계약에 이른다. 그런데 베테랑 FA들은 협상에 난항을 겪기 일쑤다. 계약금액은 물론 계약기간에서 이견이 많이 생긴다. 선수들은 무조건 최대한 많은 기간을 보장받길 원하지만, 구단은 자꾸 선택의 여지를 남겨 놓고 싶기 때문이다. 대부분 ‘3년’과 ‘2+1년’ 사이에서 대립하느라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곤 한다. 최근 계약한 NC 손시헌(2년 15억 원)과 이종욱(1년 6억 원)처럼 30대 후반에 이른 선수라면 아무리 과거 국가대표급 기량이었다 해도 계약 기간이 더 줄어든다.
몸값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은 그동안 팀에 공헌했던 시간을 몸값으로 보상받고 싶지만, 구단들은 앞으로 이 선수가 얼마나 더 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는다. D 구단 운영팀 관계자는 “선수들은 과거와 현재를 얘기하고, 구단은 미래를 얘기한다. 결국 양쪽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는 베테랑 FA들을 위한 해결책으로 ‘FA 등급제 도입’을 꼽기도 했다. 외부 FA를 영입할 때 보상선수를 내줘야 하는 규정 탓에 이른바 ‘준척급’ FA들의 이적이 어려워지고 있어서다. A급 선수가 아니라면 보상선수 없이도 팀을 옮길 수 있게 해야 제도의 취지에 맞는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그마저도 통하지 않는 분위기다. 넥센(채태인), 롯데(최준석과 이우민), kt(이대형)가 일찌감치 “보상선수를 받지 않고 이적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선언했지만,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 외부 구단이 나타나지 않았다. 국가대표 붙박이 2루수였던 정근우조차 협상에 난항을 겪었을 정도다. 각 구단들이 대형 FA로 확실한 전력보강을 꾀하는 것 외에는 “내부에 있는 신예들을 육성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E 구단 관계자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실제로 구단들이 선수 몸값에 금전적으로 부담을 많이 느끼는 부분도 있다”며 “대형 FA 영입에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상대적으로 베테랑 FA에게 단기적으로 투자할 자금이 많지 않다”고 귀띔했다. “이미 선수단 내에서 억대 연봉자도 많이 늘어나지 않았나. 결국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고 베테랑들은 예전보다 더 빨리 푸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지난 2013년 겨울 대형 FA 계약을 통해 한화 이글스와 계약한 정근우와 이용규. 다시 4년이 흐른 뒤 둘의 행보는 엇갈리고 있다. 사진 제공=한화 이글스
# FA 포기 이용규의 상징적 행보
그런 의미에서 한화 이용규는 올 시즌 상징적인 행보를 보였다. 국가대표 외야수인 그는 올해 FA 권리 행사를 1년 미뤘다. 2014년 한화와 4년 67억 원에 계약했고 이번 시즌을 끝으로 다시 FA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올해 팔꿈치 통증 탓에 개막 엔트리에서 빠졌고, 복귀 후에도 다시 오른 손목 골절로 재활하느라 1군에서 57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심지어 올해는 손아섭(롯데)과 민병헌(롯데와 계약) 같은 초대형 FA 외야수들이 함께 시장에 나온 상황이었다. 결국 이용규는 FA 시장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FA 신청을 1년 미루고 내년에 다시 자격을 얻기로 했다.
연봉 협상에서도 한발 물러났다. 이용규는 FA 계약 마지막 해인 올해 연봉 9억 원을 받았지만 내년 시즌에는 절반도 안 되는 4억 원에 사인했다. 무려 5억 원이 삭감됐다. 이전까지는 박명환이 2011년 FA 계약 기간이 끝나고 LG와 재계약하며 받아들인 4억 5000만 원 삭감이 최대였다. 당시 박명환은 5억 원에서 5000만 원으로 깎였다. 이용규가 그 금액을 넘어 역대 KBO 리그 연봉 최다 삭감액을 기록한 것이다.
이용규는 올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까지 태극마크를 달았을 정도로 여전히 정상급 외야수다.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다. 사인 후 구단을 통해 “2018년은 개인과 우리 팀에 매우 중요한 시즌이 될 것이다. 야구에만 집중하기 위해 일찍 계약을 마쳤다”고 했다.
그렇게 이용규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택했다. 유난히 차갑게 얼어붙은 올해 베테랑 FA 시장은 결과적으로 이용규의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아시안 메이저리거 부익부 빈익빈…다르빗슈는 1억 달러 ‘조준’ 이치로는 컴백홈 ‘고민’ 아시안 메이저리거들에게도 ‘부익부 빈익빈’은 남의 일이 아니다. 최근 메이저리그는 일본인 투수 오타니 쇼헤이(23) 영입전으로 뜨거웠다. 오타니는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이자 3할 타율을 치는 타자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괴물’로 이름을 날렸고 뉴욕 양키스를 비롯한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들이 일제히 관심을 보였다. 결국 오타니는 포스팅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고, LA 에인절스를 자신의 소속팀으로 택했다. 그러나 다른 아시아 선수들에게는 오타니를 둘러싼 경쟁이 ‘남의 일’이다. 이미 한국인 메이저리거 세 명이 국내로 돌아왔다. 올해 샌프란시스코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를 밟았던 황재균이 kt와 4년 총액 88억 원에 FA 계약을 했다. 1년 동안의 짧고 굵은 빅리그 도전을 마치고 유턴했다. 지난해 미네소타에 입단했던 박병호는 친정팀 넥센과 연봉 15억 원에 계약했다. 향후 2년간 보장된 연봉 70억 원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볼티모어와 필라델피아를 거친 김현수도 4년 115억 원에 LG 유니폼을 입었다. 공교롭게도 김현수가 9년간 뛴 두산과 잠실구장을 함께 쓰는 라이벌 팀이다. 사진 출처=마이애미 말린스 공식 페이스북 국내에서는 환대를 받았지만 메이저리그에선 설 자리가 없었던 이들이다. 일본인 메이저리거들도 다르지 않다. 아시아 선수 가운데 빅리그에서 가장 크게 성공했던 스즈키 이치로는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3000안타 대업을 이룬 선수지만 45세라는 나이가 걸림돌이다. 원 소속팀 마이애미는 수뇌부가 바뀌면서 이치로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치로는 일본 복귀와 마이너리그 계약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외야수 아오키 노리치카도 메이저리그 보장 계약이 불투명하다.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정교한 타격을 뽐냈지만, 거포를 선호하는 최근 메이저리그 외야수 흐름에 맞지 않는다. 뉴욕 메츠에서 방출됐고, 아직 미국에서 소속팀을 찾지 못했다. 주니치와 야쿠르트에서 아오키에게 관심 있다는 소식이 일본 언론에서 꾸준히 흘러나오고 있다. 요미우리 에이스 출신인 우에하라 고지도 40대 초반이라는 나이와 올 시즌 부진한 성적 탓에 새 소속팀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무조건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겠다는 입장이다. “메이저리그 구단 제의가 없으면 은퇴하겠다”는 생각까지 이미 밝혔다. 오타니 못지않은 관심 속에 메이저리그로 건너갔던 다나카 마사히로도 올해 ‘대박’을 칠 기회를 날렸다. 올해 말 옵트 아웃(잔여계약을 포기하고 FA 자격을 취득)이 가능한 조항을 계약서에 포함시켰지만, 하필 올 시즌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결국 잔류를 선언했다. LA 다저스에서 FA로 풀린 다르빗슈 유 정도가 유일하게 이슈의 한복판에 있다. 1억 달러 이상 계약이 유력하다. LA 에인절스에서 오타니와 한솥밥을 먹을 수도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