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감사에 출석한 황창규 KT 회장이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2002년 민영화됐지만 KT는 정권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KT 수장 자리는 정권에서 임명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한 비밀로 통했다. 민영화 이후 1대 이용경 사장을 제외하곤 2대 남중수 사장과 3대 이석채 회장은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 황창규 회장 거취가 관심을 끄는 이유다.
남 전 사장과 이 전 회장도 황 회장처럼 연임에 성공했지만 둘은 ‘지난 정권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고, 검찰 수사까지 받았다. 참여정부 때 임명된 남 전 사장은 MB 정권 초에 물러났고, 그 자리를 이 전 회장이 이어 받았다. 그러나 이 전 회장 역시 박근혜 정부 들어 ‘MB맨’으로 지목받아 임기를 남겨둔 채 회사를 떠나야 했다.
지난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부터 재계에선 황 회장이 과연 버틸 수 있을지에 시선이 모아졌다. 친문 핵심부에선 ‘황 회장이 알아서 나가주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황 회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세 차례 순방 때 모두 동행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기류를 반영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들렸다. 10월 국정감사 땐 신경민 민주당 의원이 황 회장에게 ‘최순실 게이트’를 언급하며 “지금이라도 자진사퇴하라”고 공세를 가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황 회장 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신경민 민주당 의원의 국감 질의에는 “이 자리에서 말하기 부적절하다”며 피해갔다. 익명을 요구한 KT의 한 임원은 “(황 회장이) 심적으로 상당히 힘들어하고 있을 것이다. 황 회장을 흔들고 있는 의도를 모르겠다. 왜 정치권에서 사기업 회장 교체를 운운하느냐. 과거에 비슷한 일들이 있었긴 하지만 그런 부조리를 없애겠다고 하는 게 현 정권 기조라고 알고 있다”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KT는 12월 15일 임원승진 및 조직개편을 단행했는데, 이를 놓고도 재계에선 뒷말들이 무성하다. 황 회장이 여권의 직·간접적인 퇴진 요구를 사실상 거부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그중 하나다. KT의 또 다른 직원은 “이번 인사를 통해 황 회장이 조직을 확실하게 장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황 회장이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셈”이라고 귀띔했다.
이를 바라보는 친문 핵심 인사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당청 관계자들은 황 회장 거취와 관련된 질문에 강도 높은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들은 민감한 사안인 만큼 신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황 회장을 바꿔야 한다는 데엔 입을 모았다. 한 친문 의원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교체하기 위한) 여러 방법이 있다. 몇몇이 모여 구체적인 안들을 논의 중”이라고 귀띔했다.
사기업 회장 자리를 바꾸려는 시도가 문제가 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또 다른 친문 핵심 인사는 “최순실 국정농단을 비롯해 여러 일에 연루돼 있어 회장직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게 우리뿐 아니라 KT 구성원들 다수의 생각”이라면서 “황 회장 교체는 적폐청산 일환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예전 정권의 사기업 인사 개입과는 다른 성격”이라고 답했다. 앞서의 친문 의원도 “국민들 지지를 받을 것이다. 버티면 버틸수록 황 회장은 고립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 당과 청의 몇몇 인사들은 여러 차례 모여 황 회장 교체 등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 참석했던 한 친문 관계자는 “여권 핵심 인사들이 현안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다. 최근 들어 황 회장 문제를 주요 이슈로 다뤘다”면서 “황 회장이 안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를 처리해야할지 얘기했다. 꽤 센 수위의 발언들도 나왔다”라고 귀띔했다. 어떤 발언이었냐는 질문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황 회장에 대해 격앙된 말투를 보인 현직 의원도 있었다”고 답했다.
이들은 황 회장과 KT 관련 내용이 담긴 사정기관 자료들까지 확보해 활용 여부를 검토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 회장을 향한 여권 비토 기류가 향후 사정 드라이브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대목이다. 모임에서 나왔던 강경 발언 역시 이러한 움직임과 연관돼 있다고 한다. 검찰이 최근 들어 황 회장에 대한 첩보 수집을 강화하고 나선 것도 이와 맞물려 받아들여진다.
또 KT 사정에 밝은 재계 인사 A 씨를 통해 황 회장이 물러날 경우 후임으로 누가 적합할지에 대한 보고서도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엔 통신업계 유력 인사, KT 전직 임원 등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앞서의 친문 관계자는 “황 회장이 끝까지 버티면 더 미뤄지겠지만 내년 설 연휴를 전후로 결론이 나지 않을까 싶다”면서 “황 회장으로서는 억울한 측면도 있겠지만 대세를 거스르려 해선 안 될 것이다. 황 회장에 대해 검찰 수사를 포함한, 강도 높은 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다. 전임인 이석채 전 회장도 결국 검찰 수사까지 받은 사례가 있다. 알아서 잘 판단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에 대해 재계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임기가 보장돼있는 사기업 회장 교체를 무슨 명분으로 밀어붙이느냐는 것이다. 정권 입맛에 맞는 인사를 임명해 KT를 좌지우지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나온다. 자유한국당의 한 의원은 “황 회장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매번 반복되는 이런 악습은 끊어져야 한다. 정권마다 회장이 바뀐다면 임기가 왜 필요하냐”면서 “황 회장 교체는 오히려 여권에 정치적 부담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