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추는 롯데가 잘 끼웠다는 평이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김상동 부장판사)는 롯데그룹 전반에 대한 경영비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롯데그룹 총수 일가에 대한 선고를 하며, 엄격한 판단 기준을 적용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롯데그룹 오너 일가에 대해서가 아닌 검찰의 ‘증거 입증’에 대해서 말이다. 횡령과 배임 혐의 중 상당 부분에 대해 ‘입증이 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기업 사유화의 단면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라면서도 신동빈 회장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법원의 판단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징역 1년 8개월, 집행유예 2년이었다. 오히려 오너 일가에게 임금을 챙겨준 혐의 등에 대해 더 높은 책임을 신격호 명예회장에게 물었다. ‘횡령·배임·탈세’ 혐의 가운데 횡령과 배임만 일부 유죄로 판단,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올해 95세인 신 회장의 ‘나이와 건강 상태’를 이유로 구속은 결정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 관련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기소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결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고성준 기자
검찰 분위기는 정반대다. 법원의 첫 판단에서 낙제점을 받은 셈이기 때문. 분위기가 좋지 않다. 수사팀 관계자는 “1000억 원대 규모의 배임 혐의가 유죄가 나도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수준이었다”며 “대부분이 무죄로 난 것은 그동안 2개 부서 검사들이 달라붙어 한 수사가 실패라는 것 아니냐”고 반발했다. 검찰은 구체적인 법원의 판단을 확인한 뒤, 항소할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시작부터 결심 공판 때까지 검찰은 ‘자신감’이 넘쳤다. 지난해 6월 10일.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 산하 특수4부와 첨수1부 등은 롯데전담수사팀으로 지정돼 롯데그룹에 대한 전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압수수색 대상지만 17곳에 달했고, 하루 압수수색 투입 인력이 200여 명에 달하는 매머드급 수사였다. 그 뒤에도 수차례 추가 압수수색을 통해 신동빈 회장, 신격호 명예회장 등 롯데그룹 일가 전체의 범죄 혐의를 확인하고 나섰다.
말 그대로 롯데를 ‘탈탈’ 털었다. ‘나오는 먼지까지 다 털었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 기소되지 않았지만, MB 정부 시절 제2롯데월드 건축 인허가가 나온 배경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의혹들은 혐의로 연결시키기에는 증거가 부족해 전격적인 수사로까지 이어지지 않았지만, 배임과 횡령은 구체적으로 다 확인했다는 게 당시 수사팀 관계자들의 설명이었다.
신동빈 회장의 혐의는 총수 일가에게 500억 원대 ‘공짜 급여’를 지급(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또 롯데시네마 매점에 영업이익을 몰아주거나 롯데피에스넷 유상증자에 다른 계열사를 동원하는 등으로 1300억 원대 손해를 입힌 혐의(배임)도 적용했다.
엄청난 ‘범죄 혐의 금액’만큼이나, 검찰의 구형도 상당했다. 검찰은 결심공판에서 신격호 명예회장과 신동빈 회장에게 각각 징역 10년과 벌금 3000억 원, 1000억 원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함께 기소된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과 신 명예회장과 사실혼 관계에 있는 서미경 씨는 7년을 구형했고,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에겐 징역 5년이 구형됐다.
하지만 법원은 신격호, 신동빈 부자(父子) 외에 함께 기소된 이들 대부분에 대해서도 ‘가벼운 형’을 선고했다. 개인 범죄 혐의로 이미 구속된 상태인 신영자 이사장만 징역 2년을 선고 받았고, 서미경 씨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함께 기소된 경영진들 역시 처벌을 대부분 면했다. 롯데그룹의 2인자로 부상한 황각규 롯데지주 사장과 소진세 롯데그룹 사회공헌위원장, 강현구 롯데홈쇼핑 사장 등은 무죄, 채정병 전 롯데그룹 정책본부 지원실장만이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신격호 롯데그룹총괄회장이 장남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함께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롯데그룹 오너가 비리’와 관련 1차 공판을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하지만 롯데 잔혹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신동빈 회장이 피고인으로 받고 있는 재판이 또 있기 때문. 앞서 신 회장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 최순실 씨 주도로 설립한 K스포츠재단에 면세점 특허를 대가로 돈을 건넨 혐의로 징역 4년을 구형 받은 상태다. 법원이 내년 1월 진행될 선고공판에서 신 회장에 대한 뇌물공여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면서, 신 회장에 대해 실형을 결정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일 신 회장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될 경우, 앞서 선고받은 ‘집행유예’는 2심에서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다. 통상 별도의 사건으로 구속된 피고인에 대해서는 ‘집행유예’를 선고하지 않기 때문. 신 회장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된 상태에서, 롯데그룹 사건 2심 선고가 이뤄질 경우 어떤 양형을 결정하더라도 ‘집행유예’를 붙일 수 없다. 자연스레 형이 늘어나게 되는 셈이다. 실제 이번 재판에서 유일하게 실형을 선고받은 신영자 이사장 역시 별건으로 이미 구속된 상태여서 집행유예를 받지 못하고, 2년을 더 살게 된 구조다.
게다가 전병헌 전 청와대 수석이 e스포츠협회를 통해 롯데홈쇼핑의 뇌물을 받은 사건도 부담스럽다. 전 전 수석의 영장이 기각되는 과정에서 검찰이 홈쇼핑 전반의 뇌물 제공 의혹으로 수사 범위를 넓혔기 때문. 검찰은 당초 ‘롯데는 기소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판단했지만, 이후에 GS홈쇼핑으로까지 수사가 확대되면서 결국 강현구 전 롯데홈쇼핑 사장까지 불구속 기소됐다. 향후 있을 홈쇼핑 재심사에 악재라는 지적도 있다.
로고까지 바꾸면서 새롭게 나아가려던 롯데그룹이 검찰과 법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려면 최소 1~2년은 더 걸린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법조계 관계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경우 1심도 1년 가까이 걸리는데, 2심에 대법원까지 결론이 나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겠느냐”며 “롯데그룹 오너 일가가 서초동에서 자유로워지는 데는 최소 3년 이상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