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곤 외곽에 있는 인세인 교도소 정문. 군부통치 시절 많은 정치범들이 투옥되었던 곳이다.
[일요신문] 우리는 평소 ‘국가’의 존재를 잘 모르고 삽니다. 그러다 해외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속한 국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 범죄를 당하거나 사고가 났을 때, 시간을 다투는 중한 병이 갑작스레 발생했을 때 등. 이때 우리 해외공관이 우리 국민을 보호해주고 우리는 국가의 존재를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타국에서 재판이 벌어지고 형이 확정돼 수감되는 일도 드물거니와 형기를 마치고도 언제 나갈지 모르는 나날을 보낸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요. 끔직한 일이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습니다.
2000년 8월 25일. 이날은 양곤 외곽 인세인 교도소 정문으로 남한의 한 사람이 출소해 공항으로 끌려가던 날입니다. 2008년 5월 18일. 이날은 이 교도소 정문으로 수감 중인 북한의 한 사람이 위독해 병원으로 이송 중 숨을 거둔 날입니다. 두 사람 모두 정치범 수용소에서 각각 3년, 25년의 형기를 살았습니다. 이름은 각각 문 아무개, 강민철입니다. 남한에서 왔고 또 북한에서 왔습니다. 남한 사람은 경영권 분쟁으로 수감되었지만 이상하게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고 형기보다 8개월을 더 살고 나왔습니다. 북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아웅산 테러’ 폭파범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 역시 무기에서 25년, 또 감형을 받았지만 죽어서야 나왔습니다. 이들은 형기를 마치고도 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까요? 양 국가권력이 그들을 방치했거나 또는 귀환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먼저 군부통치 시절의 미얀마 법관행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형기를 마친 외국인은 해당국 대사관이 신병을 인도해 주어야 나갑니다. 해당국에서 인도절차를 밟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재 대사관이 없더라도 본국이 적극적으로 요청할 경우, 형기 전에 추방한 사례가 많습니다. 대만, 카메룬 등 외국죄수들도 일정기간 수감 후 그렇게 추방했습니다. 문 씨는 인도절차를 밟아주지 않아 형기만료 후에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강 씨는 데리고 갈 나라가 없습니다. 북한은 범죄를 부인했기에 때문에 그는 그냥 꺼림칙한 존재일 뿐입니다. 한국은 그후 햇볕정책을 유지하던 시기라 그를 데려오려던 분위기도 사라졌습니다.
양곤 시내의 아웅산 묘역 대한민국 순국사절 추모비. 쉐다곤 파고다 북문 부근에 있다.
두 사람은 근 3년을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지만 서로 만날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각 동을 돌며 청소하는 청소부를 통해 근황을 아는 정도였습니다. 강민철은 한쪽 팔을 잃었지만 건강하고, 운동을 열심히 했으며, 이 나라말을 열심히 공부한다는 정도로. 문 씨 역시 감방 안에서 운동과 언어공부를 꾸준히 했습니다. 그가 현지 재판 중 2심과 3심을 변호사 선임도 못한 채 직접 미얀마어로 심문에 응하고 변론을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그가 수감되던 동에는 반정부 인사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국회의 요직과 NLD 주요 위원장들입니다. 그중 한 사람이 당시의 문 씨에 대해 얘기합니다. 밤마다 똑같은 미얀마 노래를 울부짖으며 불렀다고.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그냥 끝나길 조용히 기다렸다고.
강민철은 1983년 한글날,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폭탄테러를 한 범인 중 한 사람이며, 감방에서 사망하기까지 25년간 관심을 받아온 인물입니다. 북한의 3인조 특수요원 중 한 조원은 그날 사살되었고 조장은 2년 후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는 유일하게 수사에 협조하고 범행전모를 자백하여 무기로 감형되었습니다.
당시 정치범수용소 안의 산책공간에서 그를 여러 차례 만난 미얀마 반정부 인사 윈틴의 증언입니다. “그는 북한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데 대해 깊은 실망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남한으로 갈 수도 없다고 말했지요. 그래서 그는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으로 가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한편으론 감옥에서 버마 말을 배워 이 나라에서 살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버마말을 아주 잘했어요.”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갈 것인지보다 일단 감옥을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미얀마 관행상 인도할 나라가 없는 한 그는 형기를 마쳐도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형기 후반엔 감옥 내에서 밥과 반찬을 직접 만들어 먹었습니다.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수용소 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최장기수라 그냥 내버려둔 것 같습니다. 그를 둘러싸고 면회에 대해서도 여러 얘기가 있습니다. 한국의 해외공관에서 몇 차례 면회한 사실은 그가 한국 잡지나 책을 동료에게 준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엔 거부했으나 한국말을 할 수 있어서 나중은 반겼고, 그래서 음식과 읽을거리들이 반입되었다는 것입니다.
2007년 4월 26일 고립된 미얀마와 북한은 외교관계를 복원했습니다. 24년 만입니다. 이후부터 강민철은 실의에 빠져 불안감 속에 살았습니다. 자신을 죽일 것이라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가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간질환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나는 풀려나도 갈 곳이 없다”고 괴로워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공개되진 않았지만 화장되었고 그 재는 강에 뿌려졌습니다. 당시 나이는 53세였습니다.
숱한 사건을 안고 흐르는 양곤강 모습. 나룻배가 사람들을 강 건너로 실어나른다.
강민철은 사건 당시 한쪽 팔을 잃었습니다. 끝까지 저항하며 수류탄을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자마자 터지도록 조작되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삶에 의욕을 보였지만 미얀마와 북한의 수교가 복원되자마자 얼마 후 스트레스와 간질환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던 미얀마 정보부요원의 품에서. 그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는 고향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버려진 채, 죽어서야 그 감옥을 나왔습니다. 테러사건을 부인하던 북한 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준 대목입니다.
문 씨의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미얀마 현지법인에 이사들과 주주들이 있습니다. 대주주가 허위문서를 꾸며 대표이사를 해임시킨 사건입니다. 의결이 없기에 해임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지만 허위문서로 인해 해임이 인정되어 구속에 이르고, 아무런 대응도 못하게 돼 무거운 현지판결을 받게 된 사건입니다. 나중 형기 만료 후 본국에서 그 사실을 밝혀 재판에서 모두 뒤집어 승소한 사건입니다. 외국인끼리의 경영권 분쟁이므로 당시 해외 공관에서 중재한다면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을 사안입니다. 사건은 그렇다쳐도 판결 후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사실은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자국민이 죄를 지어 수감되더라도 인권이 유린되는지를 돌봐주어야 하는 것은 재외공관의 의무일 것입니다. 정치범수용소는 일반 형사범과 달리 당연히 격리되고 면회, 편지, 독서, 집필 등이 자유롭지 못하고 통제가 심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도 외국인이라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고 합시다. 하지만 단 한 가지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현지 상고심과 출감을 국제적십자의 도움으로 해결했다는 점입니다. 상고심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8개월을 더 살고 나왔습니다. 1999년 8월 국제적십자는 미얀마 교도소내 정치범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인세인 교도소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프랑스팀장은 문 씨가 외부와 단절되어 상고할 시기를 놓쳤다는 걸 알고 급히 그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후 2000년 7월 다시 방문했을 때, 그가 형기만료가 되었음에도 수감된 상태라는 걸 알았습니다. 교도소 직원이 대법원 판결문을 읽어주어 석방통보를 안 지 약 7개월이 지난 때였습니다.
미얀마에 이어 한국에서의 기나긴 재판. 법원은 아래와 같이 판결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피고 대한민국은 그 소속 공무원이 재판결과의 통지, 상고절차에 대한 조력 등 재외국민 보호의무를 위반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원고가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2.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원고가 우리나라로 추방된 날짜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제기되었으므로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미얀마에 사는 문 씨를 수소문해 만났습니다. 그는 한 회사의 지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묻습니다. 감옥에서 밤마다 소리쳐 부르던 미얀마 노래제목이 무엇입니까? 첫 질문에 그의 눈가가 축축해집니다. 제가 그 노래를 번역해 보았습니다. ‘너’란 단어 대신 ‘조국’을 넣어보니 의미심장합니다. ‘날개가 있다면 너에게로’.
네가 없는 밤은 늘 혼자고/널 보고싶은 날이 너무 길구나/구름 사이로 날아가서/널 빨리 만나고싶다/우리 사이의 먼 거리를 날개만 있다면/너에게로 가겠어, 그때 나를 꽉 잡아줘/그래야 너에 대한 나의 설렘이 가라앉을 거 같아
그를 만나고 돌아오며 그의 말이 머릿속에 생생합니다. 그는 유년시절 고아로 자랐습니다. “버린 부모님을 원망하며 살았지만, 저를 돌봐주던 이웃누나와 선생님께 감사하며 살지 못했어요. 감옥에서 국가를 원망하며 살았지만, 저를 있게 한 나라와 제 곁의 한국인들에게 감사하며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 산 날들이 많았지만, 이젠 새로운 인생의 참회록을 마음속에 쓰고 있었습니다.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