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관례와 정치적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홍 대표도 내심 ‘믿는 구석’이 있다. 바로 PK(부산 울산 경남)와 TK(대구 경북)다. 보수 진영, 특히 자유한국당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PK와 TK만큼은 지방선거에서 결코 내줄 수 없다는 게 홍 대표 판단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 고향이기도 한 PK는 더 이상 자유한국당 ‘텃밭’이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예상 외로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이 두터워지고 있다는 얘기다. TK 역시 예전처럼 ‘자유한국당 몰표’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박은숙 기자.
# 뒤집어진 PK, 홍준표 시험대
12월 초 부산역에서 해운대로 가는 길에서 만난 한 택시 기사는 20여 분간 열변을 토했다. “자유한국당 밀어줘서 부산 사람들이 얻은 게 뭐냐”고 말문을 연 그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탄생하는 데 있어서 PK 역할이 컸지만 가덕도 공항도 못 따내고, 부산 경제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혼나봐야 돼. 자유한국당 말이에요. 저거들이 받기만 받고, 주는 거는 아무것도 없다. 지금 대통령이 부산에서 변호사 했던 사람이고, 취임하고 벌써 몇 번이나 부산에 왔다가고….오히려 자유한국당보다 낫다.” 택시 기사는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에는 표를 주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12월 중순 한 여론조사 결과도 이러한 기류를 뒷받침해 눈길을 끈다. 6월 지방선거 부산시장 가상대결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어떤 후보가 나오더라도 야당 후보를 이길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부산 CBS> 의뢰로 지난 12월 9~10일 성인 809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95% 신뢰수준, 표본오차 ±3.5%포인트), 부산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응답은 51.4%로 절반을 넘었다. 한국당(24.6%), 바른정당(5.6%), 국민의당(4.2%), 정의당(3.3%) 후보 순이었다.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적합도 면에선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이 20.7%로 가장 높았고, 그 뒤를 이호철 청와대 전 민정수석(16.7%), 정경진 부산시 전 부시장(8.6%), 최인호 의원(5.6%), 박재호 의원(3.7%)이 이었다. 한국당의 경우 현직 프리미엄을 갖고 있는 서병수 부산시장이 18.9%를 기록, 적합 지지율이 가장 높았지만 그가 인지도에서 가장 유리한 현직 시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여당 후보에게 진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여야 간 가상대결에선 4가지 조합 모두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강세를 보였다. 김영춘 장관이 부산시장 후보로 나올 경우 38.9%로 서 시장(23.8%),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14.4%), 바른정당 김세연 원내대표 권한대행 겸 정책위의장(14.3%)을 앞섰다. 이호철 전 수석(35.3%)과 박재호 의원(31.6%)도 각각의 가상대결에서 2위인 서 시장(21.9%, 22.6%)보다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 정경진 전 부시장(30.3%)이 민주당 후보로 나설 경우에도 서 시장(22.6%)을 7%포인트 이상 앞설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무소속 상태인 오거돈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최 의원, 서 시장, 김 정책위의장, 안 대표가 승부를 펼치는 가상대결에서는 오 전 장관이 24.7%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최 의원(23.4%), 서 시장(18.8%), 김 정책위의장(12.1%), 안 대표(12.0%) 순이었다.
경남지사 역시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출사표를 던질 경우 자유한국당 후보를 누구로 내세우든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란 예측이 PK정가에서는 대세로 만들어지고 있다. 울산시장 역시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참여정부 때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지냈고 문 대통령과 함께 부산 울산 경남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약한 바 있는 송철호 변호사를 내세울 것으로 보여 자유한국당으로서는 버거운 싸움이 될 전망이다. 지난 5·9 대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울산에서 38.14%를 득표, 27.46%에 그친 홍준표 현 자유한국당 대표를 10%포인트 이상의 격차로 이겼다.
부산의 한 언론인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최근 헛발질도 PK 민심을 아직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홍 대표가 부산시장과 경남지사 후보로 각각 영입을 추진했던 장제국 동서대 총장과 안대희 전 대법관이 동시에 불출마를 선언했는데 이는 홍 대표의 정무적 판단력에 흠집을 낸 것이다. 홍 대표가 PK 민심을 너무 단순하게 평가하고 자신만의 생각으로 밀어붙일 경우, 지방선거에서 큰 낭패를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 TK 홀대론 확산, 그래도 믿을 건 자유한국당?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 TK 민심은 혼란스러웠다. “설마 그럴 리가…”라는 반응이었지만 최순실 국정농단이 특검 수사 결과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국정원에 배당된 특수활동비를 박 전 대통령이 정기적으로 받아갔으며 이 액수가 수십억 원에 이른다는 검찰 수사결과까지 나오자 “정말 고개를 들 수 없다”는 자조도 지역민들 대다수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최근 지방선거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출마를 결심한 정치인들의 지역 행보가 잦아지자 “박근혜는 부끄럽지만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기댈 언덕은 없다”는 목소리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자유한국당 소속 대구의 한 현역 의원은 “박 전 대통령 때문에 부끄럽다는 말을 많이 했지만 지난 추석을 기점으로 ‘우리가 정신 차려야 된다’는 의견이 TK 유권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문 대통령이 안보에서 너무 불안한 행보를 보이고, 국가 경영을 마치 쇼처럼 한다는 것이 지역민들의 일반적 견해다. (우리가) 아무리 표를 안줬다지만 마찬가지로 TK에서 표를 받지 못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보다 더 TK 소외가 크다는 의견이 많다. 때문에 TK 민심이 문재인 정부와는 확실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12월초 경찰 고위직 인사에서 TK 출신이 대거 물을 먹으면서 “문재인정부의 인사홀대가 본격화했다”는 목소리가 빠르게 퍼졌다. 이번 인사에서 승진자는 모두 6명(치안정감 2, 치안감 4). 출신지는 전남 영암, 부산, 충북 진천, 충남 태안, 경남 합천, 서울이다. 지난 7월 26일 있었던 문재인 정부의 첫 경찰 고위직 인사에 이어 또다시 경찰 내 TK 인사 홀대가 재연된 셈이다. 7월 경찰 고위직 인사에서는 모두 4명이 승진했는데 제주, 경기, 경남, 광주 출신이었고 TK는 이름이 없었다.
경찰 출신인 윤재옥 자유한국당 의원은 7월 27일 “경찰청장을 비롯한 치안정감 이상 인사 7명 중 대구경북 출신이 한 명도 없었던 적은 최근 어느 정부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며 “이는 문재인 정부의 지나친 편중 인사로밖에 볼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도 “저는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으로서 당연히 (이번 인사에) 동의해야 되지 않겠나”라면서도 “다만 탕평·균형의 기준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의 TK 홀대론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 구인난을 가중시키는 현상으로 직결되고 있다. 민주당 당선 가능성이 떨어지면서 대구시장은 물론, 경북도지사 후보로 나설 거물급 민주당 인사가 선뜻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구시장 후보 영순위는 김부겸 행안부 장관이 꼽히지만 본인은 손사래를 치고 있다. 그는 민주당 내부로부터 무언의 출마압력을 받고 있는 형국이지만 “안 나간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차기 대권 주자이기도 한 김 장관의 출마설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습이다. 현재 본인의 출마 의사가 가장 뚜렷한 후보로는 오중기 청와대 선임 행정관 정도만 거론되는 중이다. 민주당은 공직자 출신 중에 후보군을 물색해왔지만 대다수가 고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한국당에는 지방선거에서 선수로 뛰겠다는 후보자들이 넘쳐난다. 대구시장 선거에는 현역인 권영진 시장을 비롯해 이재만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이 최고위원직을 내던지고 대구행을 결심했다. 김재수 전 농림부장관, 이진훈 대구 수성구청장 등도 출사표를 던졌다. 경북지사 선거에도 현역의원만 3명(김광림 이철우 박명재)이 당내 경선에 뛰어들었고 남유진 구미시장 김영석 영천시장도 가세, 그 어느 도지사 선거보다 뜨거운 열전이 예상된다.
경북에 지역구를 둔 자유한국당 한 의원은 “민주당이 어떤 후보를 내세우느냐에 따라 변수가 생길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로서는 경쟁력 있는 후보가 나설 가능성이 없다. 지역 민심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TK가 자유한국당의 여전한 아성이기 때문에 민주당 명함으로는 지방단체장이 되기 힘들다. 독주하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견제 심리에다 인사·정부 예산 배분에서 철저히 TK를 배제하고 있는 탓에 TK 민심은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로 완전히 쏠리고 있다”고 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