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현충사에 걸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현판. 연합뉴스
최순선 씨는 신 현충사에 있는 박 전 대통령 현판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숙종의 현판을 달아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 씨는 지난해 9월부터 박 전 대통령 현판을 내리고 숙종 현판을 달아달라고 요구했으나 문화재청에서 답변이 없자 지난해 12월 28일 자신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난중일기와 충무공 유물 일체를 올해 1월부터 현충사에 전시하지 않겠다는 전시 불허 서류를 보냈다.
현충사에서는 도난과 손상을 우려해 난중일기를 포함한 충무공 유물을 사본으로 전시하고 있지만 매년 충무공 탄신일(4월 28일)을 전후로 진품을 특별전시 해왔다. 최 씨는 박정희 현판 철거를 요구하는 이유에 대해 “현재 현충사는 박정희 기념관이라는 오명을 받고 있다”면서 “현충사라는 이름에서 충무공만 남기고 하루빨리 정치적인 색채를 씻어버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밝혔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회 측은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이종천 종회 회장은 “최순선 씨는 충무공에 대해 애정이 없는 인물이다. 과거에 충무공 유물을 팔아 치우려 했다는 의혹도 있는 사람이다. 맏며느리임에도 10년 넘게 제사에 나타나지 않았다”면서 “그런 사람이 갑자기 현충사 현판을 문제 삼으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사채업자 전 아무개 씨는 지난 200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순선 씨가 “현충사 유물 13점과 미공개 충무공 유물 82점을 180억 원에 사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다”면서 “최 씨가 유물사진도 찍어서 보내줬다”고 폭로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최 씨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충무공 기념사업회 일을 도와준다고 해서 전 씨를 만났지만 알고 보니 사업회를 이용하려고 해서 그만뒀다”면서 “(유물사진을 보낸 것은) 전 씨가 기념사업회에 전시할 유물이 있느냐고 해서 보낸 것”이라고 해명했다.
최 씨는 자녀가 없는 상태에서 종손인 남편이 사망해 충무공 유물과 토지 등을 상속받았다. 이후 상속 재산 소유권을 놓고 종회와 갈등을 겪다 지난 2003년 종회에서 퇴출당했다. 최 씨는 지난 2009년 부동산 관련 사기혐의로 구속된 적도 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의 15대 종부가 사기혐의로 구속되자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종회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도 국가 지도자다. 박 전 대통령이 쓴 현판도 역사적 가치가 있다. 현재 현충사는 사실상 박 전 대통령이 완전히 새로 지은 것이고 그 자리에 박정희 현판이 걸린 것”이라면서 “숙종 현판은 원래 제자리에 잘 있는데 굳이 박 전 대통령 현판을 떼고 그 자리에 숙종 현판을 달자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숙종이 쓴 현판은 크기가 작아 신 현충사에 맞지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정치권이 개입해 최 씨를 부추긴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최 씨와 함께 박정희 현판 철거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 스님은 지난 2016년 더불어민주당(민주당)에 비례대표를 신청했던 인물이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도 지난해 10월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현충사에 걸려있는 박정희 현판은 적폐”라면서 “숙종 현판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었다.
혜문 스님은 “제가 먼저 박정희 현판 교체를 최 씨에게 제안한 것은 맞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혜문 스님은 “박정희 현판뿐만 아니라 현충사 곳곳에 왜색이 짙은 사례가 너무 많다”면서 “궁극적으로는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가 필요하다. 현판 교체 이후에는 이러한 점들을 요구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 씨는 박정희 현판 논란과 관련해 직접 인터뷰는 거부했지만 대신 서면 답변서를 보내왔다. 최 씨는 종회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 “남편이 사망한 후 종회와 갈등이 깊어져 제사에는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 이전부터 제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라며 “손아래 동서와 양자로 들인 아들을 매번 참석시키며 충무공을 모시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최 씨는 “저는 지난해 현충사의 충무공 영정이 복사본으로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문화재청과 현충사에 항의해 진품 영정을 걸게 한 바 있다. 현충사의 정체불명 정형 향로도 법도에 맞지 않으므로 치우게 했다”면서 “단지 제사 참석 여부가 충무공에 대한 애정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현판 교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지난 2016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현충사 현판 문제가 거론되어 저도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현충사란 이름은 바로 숙종이 내린 현판으로부터 유래한다. 현충사의 역사성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숙종 현판이 충무공 영정을 모신 건물에 걸려 있어야 한다”고 했다.
궁극적으로 왜색이 짙은 현충사에 대한 대대적인 재공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는 “현충사의 왜색조경 문제는 지난 1992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현충사 일본식 조경 개선 지시’로부터 시작해 20년 넘게 제기되어 왔던 문제다. 친일 논란 작가가 그린 충무공 영정문제, 시멘트로 지어진 홍살문과 사당건물 등 아직도 개선해야 될 문제가 많다. 현충사가 겨레와 함께하는 유적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박정희 현판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주무부처인 문화재청 관계자는 “지난해 종회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이 회의를 진행해 의견을 모았고 올해 1월 중에 2차 회의를 예정하고 있다”면서 “1차 회의에서는 구 현충사 건물과 숙종 현판은 역사적 의미와 일체성을 갖고 있어 그대로 두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두 현충사의 현판 크기가 맞지 않고 구 현충사에서 숙종 현판을 떼어내면 빈자리에 어떤 현판을 걸어야 할지도 문제다. 이들의 의견을 모아 향후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다만 최순선 씨의 경우 회의 참석을 요청했는데 거절하고 기존 주장(박정희 현판 철거)만 되풀이하고 있어 난감하다”면서 “만약 전문가들이 현판을 바꾸는 것으로 의견을 모아도 문화재 위원회에 안건으로 올려서 다시 한 번 논의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