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험생이 독서실 앞 게시판에 붙은 학원 전단지를 바라보고 있다.
# “노량진과 경쟁” ‘사시족’ 떠난 자리 채운 ‘변시족’ ‘공시족’
지난 3일 오후 찾은 신림동 고시촌은 평일 낮임에도 여전히 청춘들로 북적거렸다. 거리엔 커다란 백팩을 매고 부지런히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골목골목 들어선 카페 안에는 각자 카페 한편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노트북이나 책을 보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카페 관계자는 “이 지역 카페는 24시간 운영되는 곳이 많다. 대부분 시험 준비생들이 와서 공부하니까 콘센트나 조명 등도 신경을 많이 쓴다”고 말했다.
이날 카페에서 만난 김 아무개 씨(여·30)는 코앞으로 다가온 변호사시험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서울 소재 한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다는 김 씨는 “다음 주부터 실시되는 변호사시험 공부 중”이라며 “사시가 폐지되고 나서는 변시도 경쟁률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번에 못 붙으면 고향에 내려가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사법고시가 폐지되기 전까지 신림동 학원가는 이른바 ‘법학원’으로 불리는 사법고시 준비학원들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현재 이 같은 법학원들은 사법고시 준비반이 아닌 변호사시험 준비반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사시가 폐지됐지만 변호사시험 준비생들에 의해 법학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사법고시가 폐지된 뒤 고시촌 학원가는 변호사시험, 행정고시, 각종 자격증 준비반 등으로 종목을 바꿨다.
경찰학원과 공무원 시험 준비 학원, 자격증 준비 학원 등도 새로 들어섰다. 한 공무원 시험 준비 학원 관계자는 “사시생들은 최근 몇 년 새 수요가 준 반면 공무원 준비생들은 꾸준히 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물론 공시 준비하는 입장에선 노량진이 아직까진 수요가 높지만 이곳도 꾸준히 신규 수강생들이 늘고 있어 관련 강의를 늘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흐름을 파악할 수 있듯 골목 곳곳에는 변호사 시험, 경찰 시험 등 개인 과외 전단지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경찰시험을 준비하는 한 수험생은 “노량진에 비해 방도 저렴하고 물가도 싸 이곳으로 왔다”며 “시 외곽이고 서울대생들도 많아 면학 분위기가 더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 고시원·독서실이 원룸으로, 고시식당 단골은 직장인으로
아울러 직장인들의 유입도 눈에 띄는 현상이다. 고시촌의 저렴한 월세에 이끌린 직장인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는 게 부동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 공인중개사는 “오히려 인구 유입은 사시 폐지 전보다 늘어났다”며 “무엇보다 집값이 다른 지역보다 싸기 때문에 직장인들도 많이 찾아오니까 신축하거나 고시원 등을 리모델링한 원룸이 많이 들어섰다”고 말했다.
사시생들이 떠난 자리에 값싼 물가를 찾아온 각양각색의 수험생들과 직장인 덕에 고시촌이 있는 대학동의 인구는 예전과 거의 비슷하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대학동 인구는 사법고시 폐지 유예기간인 2012년~2016년에도 2만 40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몇 년 사이 고시원은 물론 독서실, 서점 등이 문을 닫거나 원룸이나 새로운 형태의 주거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김상훈 기자
이날 오후 찾은 신림동 한 고시식당에서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꽤 볼 수 있었다. 고시식당은 고시생들이 4000~5000원에 든든히 한 끼를 챙겨 먹는 식당을 말한다. 이 식당에서 근무하는 연 아무개 씨(44)는 “오랫동안 오던 단골 고시생은 많이 떠났지만 요즘은 단골 직장인들이 많이 생겼다”며 “고시 식당인 줄 알면서도 값이 싸고 음식이 맛있으니까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 ‘창업지구’ ‘문화예술공간’ 더 젊어진 고시촌
고시촌의 색채가 엷어지면서 새로운 성격의 공간들도 생겨났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서울대가 지난해 12월 문을 연 창업지원공간 ‘녹두zip’이다. 사법시험 폐지 등으로 침체된 고시촌을 ‘창업촌’, ‘청춘촌’으로 바꾸는 관악 큐브 청년 창업밸리 프로젝트 사업이다.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 건물에 스타트업 사무공간과 지원시설, 창업 카페 등이 마련돼 있다. 녹두zip 관계자는 “기존 스타트업 기업과 예비 창업자들이 심사를 통해 현재 입주해 있거나 입주 예정”이라며 “프로젝트를 확대해 나가 창업자들을 지원하는 동시에 (고시촌) 지역 활성화에 이바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고시촌을 다양한 예술 실험이 펼쳐지는 문화 공간으로 변신시키겠다는 청년들도 있다. 서울대 미대 대학원생들이 뭉친 ‘지속가능갤러리’와 고시촌 내 첫 소극장 ‘광태소극장’이 대표적이다. ‘지속가능갤러리’는 고시촌만의 공간 특색에 맞는 미술전시, 플리마켓 등 다양한 사업을 준비 중이다. 또 지난 2015년 고시촌에 문을 연 ‘광태소극장’은 고시촌을 배경으로 제작한 <청춘동 편의점>, <청춘동 이상한 동물병원> 등을 선보이며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
신림동 고시촌의 종교생활 어떻게 변했을까 포교활동 메카? “옛말된 지 오래”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다. 임준선 기자 고시촌에서 만난 주민들과 종교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1990년대 이 지역 불교, 기독교 등 종교단체는 이곳에 상주하던 고시생들을 위해 다채로운 행사를 열어 포교활동을 벌였다. 고시촌 인근 관악산에 위치한 ‘약수사’는 주말마다 고시생들을 위한 특별 법회를 열기도 했다. 평소 공부에 지친 고시생들이 기도와 참선의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이곳엔 고시생들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벌이던 ‘인재불사연구원’이란 모임도 있었다. 기독교 활동도 활발했다. 특히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과거 신림동에는 ‘할렐루야’, ‘솔로몬’ 등 유난히 기독교 관련 고시원 이름이 많았다고 한다. 교인이 운영하는 고시원이 많았기 때문인데 일부 고시원은 선교 차원에서 형편이 어려운 수험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법시험이 폐지 여파로 고시생들이 점차 빠져나간 지금은 이 같은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공무원, 경찰 등 다른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유입됐지만 종교가 있지 않는 이상 개인 시간을 따로 투자하지 않는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고시촌 주택가에 위치한 한 교회 관계자는 “20년 전만 해도 같은 고시원에 있는 고시생들이 와서 기도도 드리고 서로 모임도 가지며 마음의 위안을 안고 갔다”며 “최근엔 공무원 준비하는 학생들이 개인 단위로 종종 오기도 하는데 얼마 안 있다가 다른 지역 큰 교회로 가거나 나오지 않더라”고 말했다. 이어 “아무래도 큰 교회를 나가면 (수험생들끼리) 학원, 공부 정보 얻기도 수월하니까 그러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과거 이곳에서 사시 준비를 한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예전만해도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쉴 때 절에 가곤 했는데 요즘은 워낙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다거나 여타 방법이 많으니까 독실한 신자가 아닌 이상 굳이 찾을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