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신이다. 모든 신은 이방에서 온다. 새로운 것은 이방에서 오고, 새로운 것이 올 때 우리는 몸살을 앓는다. 혼돈을 겪는 것이다. 새로운 것의 도래는 언제나 익숙한 것의 상실과 맞물려 있으므로.
가족처럼 지내는 어르신이 있다. 그는 패혈증을 앓으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인명이 재처(사람의 운명은 아내에게 달려있다)라며, 부인의 정성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는 그가 말한다. 눈 깜박할 사이에 삶이 저만치 가고 죽음이 가까운 손님처럼 찾아와 손을 내밀고 있다고. 병이 걸렸을 때는 죽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아내의 정성에 기대 다시 살아났는데 살아나 보니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니고 자기도 예전의 자기가 아니라는 거였다.
아프지 않으려 기를 쓰고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칠 때는 고통이 두렵기만 하더니 마음 깊이부터 언제 죽어도 억울할 게 없다고 정리하고 나니 혈액순환이 잘 안되고 걸음걸이가 부치는 것도 담담히 받아들여진단다. 이제는 정말로 바라는 게 없어졌고, 바라는 게 없으니 신기하게도 애착도, 미움도 사라졌단다. 이제는 어쩌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그저 반갑기만 하고 그저 축복해주게만 된단다. 감동이었다. 그날 나는 아주 따뜻한 축복의 점심상을 함께 한 기분이었다. 누가 나이든 사람을 쓸모없다고 하나? 쓸모없음의 쓸모를 모르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상실의 본질을 만지고 있는 상실의 철학자들인데.
건강을 원했던 자 병을, 사랑을 원했던 자 이별을, 이별을 원했던 자 동거를, 날마다 청춘이고 싶은 자 덧없음을, 권력을 사랑하는 자 배신이라는 쑥과 마늘을 씹으며 동굴의 시간을 견디며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그렇게 이것만은, 하면서 간절히 원했던 것을 제물로 바치며 일어나는 변화가 부활 같은 변화다. 삶의 함정을 만나고 실패를 만나 기가 탁, 막히는 그 시간에 한탄만 하거나 자책만 하는 사람, 남 탓만 하거나 채찍질만 하는 사람은 ‘실패’라는 손님이 와서 내밀고 있는 천사의 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보니 진정한 실력자는 잘나가는 사람이라기보다 되어가는 대로 되고 있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만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받아들인다. 그런 사람만이 자식의, 남편의, 아내의, 친구의, 동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허용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