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연일 개헌을 둘러싸고 이념 싸움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조유진 처음헌법연구소 대표는 ‘야당은 정부의 개헌을 화끈하게 받아줘야 하고, 여당은 국민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올해는 과연 개헌을 이뤄낼 수 있을까. 사진은 조유진 처음헌법연구소 대표. 임준선 기자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가 공개한 활동 보고서를 두고 ‘좌편향’ 논란이 일고 있다.
“현행 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 통일’에서 ‘자유’를 삭제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자문위는 ‘민주적기본질서가 더 넓은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들은 더 추가적은 해명을 내놓아야 한다. 헌법이란 것은 인간이 자유를 위해 투쟁해 얻은 산물이고 ‘자유’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아마도 자문위원들 모두 헌법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여기에 대해 간과한 것 같다.”
―이밖에도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사형제 폐지’, ‘노동자 경영 참여’ 항목이 자문위 개헌안에 포함되며 ‘좌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같은 경우는 특정 종교인들이 살상 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이들은 병역의무를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라 행정업무 등 다른 업무를 통해 병역의무를 마치겠다는 것이다. 사형제 폐지와 노동자 경영 참여는 오히려 북유럽 헌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로 자유민주적인 면이 더 크다. 이런 것들을 싸잡아서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을 흠집 잡는 보수들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우월성에 자신감이 없거나 확신이 없는 것이다. 현재 문재인 정부에 운동권 출신이 많은데 이들이 과거 20대 때 좌파적인 생각에 많이 빠졌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보수진영에서 이를 공격하기 위해 ‘좌파적’이라고 하는 것은 핀트에서 엇나간 것이다. 정쟁일 뿐이다. 이것을 이용해 이념 공세를 하는 것을 옳지 않을뿐더러 자문위는 문재인 정권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체다.”
―프랑스는 개헌의 모범사례로 알려졌는데, 어떤 특징이 있나.
“프랑스도 개헌이 순탄치는 않았다. 하지만 상충되는 이해관계와 정치적 세력들이 타협하며 어렵게 개헌이 이뤄졌다. 프랑스는 20여 회에 걸쳐 개헌을 했고 독일은 60여 회에 걸쳐 개헌을 이뤄냈다.”
―우리나라 정치권이 시도하는 개헌과 프랑스 개헌의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대통령 임기·연임과 지방분권 등 각종 개헌을 한꺼번에 ‘백화점식’으로 시도하고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선진국들은 한 개씩 ‘원포인트’로 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단계별로 한 개씩, 조금씩 양보해서 해결해 나가야 졸속으로 흘러가지 않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조유진 처음헌법연구소 대표. 임준선 기자
“우리는 30년 동안 개헌을 안 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가 밀려서 ‘하는 김에 다 하자’라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사회적 불만 때문이다. 2016년 겨울 촛불혁명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졌는데, 이때 불거진 민의의 표출, 국민의 불만을 다 담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런 국민적 불만을 전반적으로 다 수렴하고 싶은 욕심에 이렇게 된 것 같다. 이것이 정치의 현실이다. 국민 논의와 투표 등 어려운 절차를 요건으로 갖추고, 단계별로 우선순위를 따져 무엇이 급한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개헌이 어려운 것이다.”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무엇이 먼저인가.
“지방분권이 대통령 임기 문제보다 더 급하다. 이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잘 짚은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이 다른 나라에 비해 전반적으로 잘 만들어졌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지방분권’이다. 현행 헌법에서 지방분권에 대한 부분은 단 2개의 조문으로 수도 적고, 이마저도 ‘중앙행정기관의 말단 행정기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선진국들 가운데 중앙집권인 국가가 없다. 물론 중앙집권이 가진 효율성도 있다. 중앙에서 명령을 내리면 말단 행정까지 내려가는 효율성이 있고 이는 국가 건설 초기 단계에 잘 작동하고 성과를 낸다. 하지만 국가가 어느 정도 단계에 접어들고 발전하면 이것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지방분권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 임기에 대한 논의보다 지방분권이 먼저 개헌으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국민들이 체감하기에는 대통령 임기와 연임 논의가 더 시급한 것 같다.
“국민들이 왜 지방분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어떤 국민도 지방분권을 체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을 아예 못 하는 것이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대통령 임기는 6년도 있었고 4년도 있었다. 대통령을 세 번 할 수 있게 하던 3선개헌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겪었기 때문에 대통령 임기를 더 쉽게 체감하는 것이다.”
―지방분권 개헌은 이뤄질 가능성이 있을까.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지방분권 개헌을 원치 않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주장하지만 민주당 의원들도 이걸 원치 않을 것이다. 의원들이 가진 재정·입법권의 절반을 지방에서 가져가면 국회의원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난해 ‘지방분권개헌 토론회’에서 여야 국회의원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지방분권은 시기상조다’, ‘필요성은 알지만 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 지방분권 개헌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지방자치단체 종사자와 국가 최고지도자가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충족됐다. 두 번째 조건인 국회의원 찬성이 문제다. 이를 위해 국민들이 국회의원에게 요구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동안 개헌 논의가 수차례 있었음에도 왜 물거품으로 끝났을까.
“개헌의 전제조건은 두 가지다.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유지 강화를 위해 하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국민이 원해서 하는 것이다. 지금은 독재 시대가 아니라 민주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국민적 욕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개헌 과정에 매달리고 요구한 적이 없다. 개헌하려면 국민적 요구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국민들이 헌법을 잘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선 시민 헌법교육이 필요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자신의 임기까지도 개헌에 대한 주장을 줄곧 해왔는데.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 개헌 카드를 꺼냈는데, 개헌을 언급할 때마다 박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정부 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국면 탈출용으로 개헌을 남용하려 한 꼼수 개헌이기 때문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분노한 국민 민심에 기름을 부은 것인데 국민들은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지난해 9월, 국회 ‘응답하라 1987 개헌 나도 한마디 국민 자유발언대’ 개막식 행사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모여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은숙 기자
―개헌특위의 위원장이 지난해 이주영 한국당 의원이었다가 같은 당 김재경 의원으로 바뀌었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가 당 대표가 된 뒤 제일 먼저 한 얘기가 ‘지방선거 개헌에 대한 투표에 참여하지 않겠다’였다.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를 올해 지방선거 투표와 함께 버무리지 않겠다는 뜻인데, 아마 홍 대표는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위원장으로 앉힌 게 아닌가 싶다.”
―개헌안 통과에 자유한국당의 찬성표가 필요한데, 다소 소극적인 모습이다.
“한국당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 늪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허우적대는 것 같다. 지지율이 낮은 상황에서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선 안 된다. 만약 문 대통령이 개헌을 주장했으면, 한국당은 이를 화끈하게 받아줘야 한다. ‘문 대통령 집권 초기니까 도와주겠다. 대신 개헌 과정에서는 국민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고 국민들과의 토론으로 의견을 수렴하자’고 주장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반대하다가 개헌이 잘 안 되면 ‘한국당 때문에 개헌이 안 됐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고, 개헌이 이뤄졌다고 해도 한국당의 몫은 없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행보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는 곤란하다. 제1 야당다운 대인배 같은 면모를 보여주길 바란다.”
―민주당은 다른 당으로부터 연일 ‘청와대 출장소’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민주당은 정부와 정치적 공동체다. 집권당이니 대통령과 함께 갈 수밖에 없고 오히려 여기서 엇박자가 나는 것부터가 못 볼 꼴이다. 다만, 많은 의원들끼리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입장 정리가 힘들 수 있는데, 민주당은 이견을 잘 조화시켜 통일된 개헌안을 당 차원에서 제시할 필요가 있다. 국민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 부분을 잘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