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제례 중 ‘취위’가 진행되고 있다. ‘취위’는 제향을 시작하기 전에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서는 절차다. 연합뉴스
사극을 보면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 여기서 종묘란 역대 왕들의 신위(위패)와 공신들의 신주를 모신 사당, 사직은 조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두 단어가 합쳐져 국가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곤 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자료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종묘라는 단어가 무려 7975번이나 등장한다(‘고종실록’ 및 ‘순종실록’ 제외). 조선은 종묘제례를 나라의 가장 큰 일로 꼽을 정도로 중하게 여겼으며, 신하들과 함께 갖가지 제례에 대해 의논하는 일은 왕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조선 왕실은 대체 왜 이렇게 조상에 대한 제례를 중요하게 다뤘을까. 유교가 국가의 근본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는 조상에 대한 숭배를 인간의 도리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법도로 여겼으며, 이러한 법도를 실행하는 제사를 특히 중시했다. 종묘제례는 왕실에서 거행되는 장엄한 국가 제사로서, 임금이 친히 받드는 존엄한 길례(吉禮)였다. 유교사회에서는 길례·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家禮) 등의 다섯 의례(五禮)가 있는데, 그 중 길례인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종묘제례는 크게 정시제(定時祭)와 임시제(臨時祭)로 나뉘며, 계절에 따라 햇과일이나 곡식을 올리는 천신제(薦新祭)도 있었다. 정시제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첫 달인 1월·4월·7월·10월과 납일(12월에 날을 잡아 지내는 섣달제사)에, 임시제는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지냈다. 종묘제례는 해방 이후 한때 폐지되기도 했으나, 1969년부터 전주리씨대동종약원이 행사를 주관해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봉행하고 있다.
신주를 감실에서 받들어내어 좌대에 모시는 진청행사. 연합뉴스
종묘제례는 제사를 지내는 예법과 예절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의식이기 때문에 제례는 매우 엄격하고 장엄하게 진행된다. 의례의 절차는 15세기에 정해졌으며 오늘날까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종묘제례는 신(조상)을 맞이하는 절차, 신이 즐기도록 하는 절차, 신을 보내드리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세조실록’ 세조 10년(1464) 1월 14일의 기록에는 종묘에 제례를 올리는 과정이 장문의 글로 설명돼 있다.
제례 때에는 기악과 노래, 춤이 함께 연행됐는데, 이것이 바로 종묘제례악이다. 음악은 편종, 편경과 같은 타악기가 주선율을 이루고, 여기에 당피리, 대금, 해금, 아쟁 등 현악기의 선율이 더해진다. 또한 이 위에 장구, 징, 태평소 등의 악기가 다양한 가락을 구사하고 노래가 중첩되면서 종묘제례악은 특유의 중후함과 화려함을 느끼게 해준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종묘는 빼어난 건축미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종묘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49위)가 모셔져 있으며, 영녕전의 16개 신실에는 추존(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된 왕과 왕비의 신주(34위)가 봉안돼 있다. 유교문화권에서 ‘효’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에, 사후에도 조상의 신위는 귀하게 모셔졌으며, 이는 특히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던 왕실에서 더욱 엄격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종묘의 신주들이 선조 임금보다 더 앞서서 한양을 떠나 개성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종묘제례악 보탱평지무가 재현되고 있다. 연합뉴스
‘남녀가 유별하다’는 의식 때문이었을까. 흥미롭게도 왕비의 신주는 아무나 만질 수 없었다. 태종 15년(1415)부터는 일반 관원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내시부에 소속된 환관으로서 제향(나라 제사)에 차출된 ‘궁위령’만이 왕비들의 신주를 옮길 수 있었다. ‘왕의 일기’인 <일성록> 영조 52년(1776) 1월 6일자에는 세손인 이산(정조)이 승지와 이러한 제도의 개선을 논의하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여기서 정조는 “궁위령이 남자라는 것은 매한가지이니, 매우 의의가 없는 일이다”라며 대축(제향 때 축문을 읽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이 대신 그 일을 맡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종묘제례는 ‘효’를 국가 차원에서 실천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 유대감과 질서를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 문화유산인 종묘제례의 의미와 가치는 오늘날에도 다시금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