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가 배우를 부르다
‘1987’에 가장 먼저 참여하기로 결정한 배우는 극중 대공수서처장인 박처원 역을 맡은 김윤석이다. 장준환 감독의 연출작 ‘화이’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김윤석은 ‘1987’에서 “탁 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역사에 길이 남을 문장을 직접 대사로 옮겨야 하는 중책을 맡았다.
박처원은 이 영화 속에서 ‘악의 축’이다. 민주화 열기를 다룬 작품에서 이런 역을 소화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고(故) 박종철 열사의 고등학교 2년 후배로 알려진 김윤석은 주저 없이 이 역할을 택했다.
촬영 현장은 물론 캐스팅 과정에서도 의기투합한 김윤석과 하정우. 그리고 강동원은 홍보 스틸과 포스터에도 등장하지 않는 작은 배역을 맡아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영화 ‘1987’ 홍보 스틸 컷.
그는 ‘1987’ 시사회에서 “박 처장 역할을 제안 받고 굉장히 갈등을 많이 했다. 장준환 감독과는 이번이 두 번째 호흡인데 내겐 좋은 역할을 안 줄뿐더러 어려운 캐릭터를 준다”며 ”특히 내가 ‘탁 치니까 억’이라는 그 대사를 내가 치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박종철 열사는 제 고등학교 선배님이신데 이 배역을 누군가는 맡아야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보자 했다”고 밝혔다.
촬영 전부터 장 감독과 머리를 맞댄 김윤석은 다른 배우들을 섭외하는 데도 큰 힘을 쏟았다. 김윤석은 장 감독과 막걸리를 마시는 자리에 절친한 배우 하정우를 불러냈다. 이미 ‘1987’의 대본을 받은 하정우는 당시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을 촬영 중이었다. 함께 모여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하정우는 주저 없이 출연을 결심했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금 극중 고(故) 이한열 열사를 연기한 배우 강동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동원은 영화 ‘전우치’ ‘검은사제들’ ‘군도’에서 각각 김윤석, 하정우와 함께 출연해 친분을 맺고 있었다. 장 감독까지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밥을 먹으며 의기투합했고 비로소 내로라하는 배우 3명이 모두 출연하는 ‘1987’이 결실을 맺게 됐다.
물론 그 이전에 장 감독의 밑작업은 있었다. 장 감독은 단편 ‘러브 포 세일’을 촬영하며 강동원을 주인공으로 기용한 적이 있다. 이후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사이었는데, 막상 ‘1987’의 출연 제의를 선뜻 할 수 없었다. 출연 분량을 따졌을 때 이 역할이 강동원이라는 배우가 맡기에는 너무 작다고 느꼈던 탓이다. 하지만 장 감독의 진심에 친한 배우들의 설득까지 더해지며 강동원은 이한열 열사라는 역사적 인물을 연기하게 됐다.
# 개인적인 인연으로
‘1987’에는 또 한 명의 ‘1000만 배우’가 등장한다. 역대 가장 많은 1000만 영화에 출연한 배우 오달수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극 중 신문사 사회부장 역을 맡아 특별출연 형식으로 참여했다. 잠깐의 등장이었지만 임팩트는 컸다.
‘1987’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오달수는 먼저 제작진을 찾아가 “작은 배역이라도 맡고 싶다”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역시 김윤석과 마찬가지로 박종철 열사의 고등학교 후배이기 때문이다. 오달수는 “자랑스러운 선배님의 후배로서, 이 영화에 참여하는 게 도리이자 뜻깊은 일이 될 것 같았다”며 “감독님께 잠깐이라도 출연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87’에서 경찰 총수인 치안본부장으로 열연한 배우 우현에게도 이 영화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1987년 그는 연세대 총학생회 사회부장으로 역사적 현장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과 49재 행사까지 직접 이끌었다. 그런 우현이 ‘1987’에서는 대척점에 선 인물을 연기했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이에 대해 우현은 한 연예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사회부장으로 모든 집회를 관할했다”며 “그 영화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영화 ‘1987’ 홍보 스틸 컷
극 중 안기부장 역으로 깜짝 등장한 배우 문성근에게 ‘1987’은 의미가 큰 작품이다. 그의 아버지인 고(故) 문익환 목사는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1987’의 엔딩 영상에서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를 외치는 인물이 바로 문 목사다. 이런 이유로 문성근 역시 배역의 크기 등에 상관없이 이 영화에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목소리만으로 이 영화에 참여한 배우도 있다. 바로 문소리다. 학생운동 참여를 주저하던 여주인공 연희(김태리 분)가 이한열 열사의 사망소식을 듣고 각성해 광장으로 뛰쳐나오는 장면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라고 외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문소리다. ‘1987’을 연출한 장 감독이 아내인 문소리는 이 영화의 제작을 고민하던 남편을 독려한 후 목소리 연기까지 참여한 또 다른 주역이다.
이외에도 박종철 열사의 삼촌 역으로 등장한 배우 조우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를 연기한 배우 정인기 역시 작은 역이라도 꼭 참여하고 싶다고 ‘셀프 캐스팅’을 자처했다. 장 감독은 “먼저 출연 의사를 밝혀온 배우들이 있었다. 내겐 행운이었고 감동이었다”며 “1987년으로부터 30년 후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